전문가들 "문장 왜곡에 어색한 표현, 오자 투성이"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첫 문단이다.
시인이자 당대 최고 문장가이던 육당(六堂) 최남선이 쓴 이 선언서는 지금도 명문장으로 통한다.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이희승 박사가 쓴 현대어 풀이본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났던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에 설치된 독립선언서 영문 번역본은 어색한 표현과 오자, 원문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거나 왜곡한 문장 투성이어서 당대의 명문장인 원문의 격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연합뉴스가 탑골공원에 있는 독립선언서 영문본을 살펴보고 영문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이 같은 오류나 적절하지 않은 번역이 한눈에도 적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일례로 선언서 두번째 문단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는 'We make this proclamation having back of us 5000 years of history'라고 번역돼 있다.
하지만 'have back of us'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이는 'on the foundation of 5000 years of history' 정도로 충분히 풀어쓸 수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했다.
넷째 문단의 '슬프다! 오래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은 'Assuredly, if the defects of past are to be rectified'로 번역됐다.
'슬프다'는 의미가 다른 'Assuredly'(기필코)보다 'Alas' 'Woe to us' 등 원문의 감정을 살리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 또 뒷부분은 '과거의 결함을 바로잡으려면'으로 해석돼 외세 침략에 따른 민족의 비통함을 드러낸 원문의 느낌이 사라졌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선언문 아래 붙은 '공약 3장' 중 첫 문장은 원문의 표현을 아예 빼버렸다.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 부분을 번역문은 'This work of ours is in behalf of truth, religion, and life, undertaken at the request of our people'로 옮겼다.
'정의'를 영어로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는 'justice'이지만 '진실' 또는 '진리'에 가까운 'truth'를 썼다. 원문에는 '종교'(religion)라는 말이 없고, 'morality' 정도로 번역 가능한 '인도(人道)'는 번역 과정에서 아예 빼버렸다. '생존'은 'life' 대신 'survival'이 더 적절하다.
이어지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는 '누구에게도 폭력이 가해지게 하지 마라'(let no violence be done to any one)로 단순하게 의역, 원문의 격조를 살리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다른 문장에서는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을 번역하면서 원문의 목적어구 중 '사람'을 'insect'(곤충)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심지어 'sincere'를 'sincero'라고 쓴 오자까지 나왔다.
주술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거의 비문 수준으로 보이는 문장이나 나쁜 글쓰기의 대표 사례인 수동태 남발도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국내 한 대학 강사로 재직 중인 호주인 M(38)씨는 선언문 영역본을 살펴보고는 "너무 문제가 많아 계속 읽기조차 어려운 수준"이라며 "수많은 오류를 다 고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를 강의하는 한 학원 원장 김모(32·여)씨는 "멋대로 표현을 빼버리고 문법에 맞지 않는 부분도 발견되는 등 엉망진창"이라며 "외국인이 이런 문장을 보고 과연 3·1절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관할 자치단체는 선언문 번역자가 누구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종로구 관계자는 "1980년에 선언문 비문을 세웠는데, 당시 설치를 서울시가 담당해 번역자가 누구인지 여기서는 알 수 없다"며 "자치구에서는 비문을 관리만 하지 그 역사나 내용상 오류 등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서울시의 담당 부서 관계자도 "번역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