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가족드라마가 결국은 세대 간의 소통을 다룬다. 즉 고부 갈등을 다루는 가족드라마는 결국 그 고부 간의 화해를 다루기 마련이고, 서로 다른 빈부 차의 두 집안 사이에 벌어지는 혼사장애의 가족드라마는 빈부와 상관없이 사랑을 이루려는 젊은 세대와 그래도 결혼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집안들이 하는 것이라는 나이든 세대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러니 ‘내 딸 서영이’가 세대 갈등을 다룬다는 것이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새로운 것은 그 세대 갈등을 다루는 시점이 어느 한 세대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어떤 균형점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내 딸 서영이’는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서영이(이보영)와 나이든 세대를 대변하는 그의 아버지 이삼재(천호진)의 두 시점의 균형을 맞춘다.
서영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녀가 심지어 아버지를 부정하고 거짓 결혼을 하게 되는 그 상황이 십분 이해된다. 잇따른 사업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가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이삼재에게 서영이는 심지어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보통의 가족관계라면 부모가 자식을 챙기고 보살펴야 할 텐데 서영이의 경우에는 거꾸로 부모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니 이미 가족의 기능을 상실했던 이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어쩌면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런 과거를 갖고 있는 아버지라도 결국은 부정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 아버지는 과거를 뉘우치고 딸의 행복만을 바라면서 그녀의 주변을 서성댄다.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는 그를 보면서 많은 기성세대들은 아마도 “저것이 바로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이 아버지와 서영이의 이야기는 우리네 개발시대를 건너온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며 살아왔지만, 그것이 모두 가족의 행복을 만들어준 것만은 아니라는 결과에 허탈해 한다. 결국 행복이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지, 누가 외부에서 만들어주거나 누구를 위해 살아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셈이다. 그 안에서 자식들 역시 가부장제가 가진 가족 중심주의가 자신의 행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러니 그 서영이와 아버지로 대변되는 세대 갈등은 이미 우리네 현 가족 속에 잠복되어 있었던 셈이다.
지난 대선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이 세대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당면과제이자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세대 간의 단절은 점점 더 골이 깊어가고 있고, 바로 그 반대급부로서 그 소통에 대한 갈증도 커져가고 있는 중이다. ‘내 딸 서영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판타지를 제공한다. 서영이의 입장과 아버지의 입장을 균형 있게 그려내는 것은 그 양측이 가족이라는 틀을 바라보는 시각 차를 극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사회극이 아니라 가족드라마라는 점에서 어떤 지점에 이르러 그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이 기대감만큼 강한 판타지는 없다.
하지만 드라마가 서영이와 아버지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어 눈물과 감동의 소통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이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결국 드라마적인 해결과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딸 서영이’가 세대 간 소통의 문제를 환기시킨 것은 의미 있다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를 보고 나서 그 감동에 도취되기보다는 그 드라마를 함께 보고 있는 가족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일 게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걸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의 어떤 시스템이 이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