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판, 그 애증의 인연들
정치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말이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정파적 이해득실에 따라 상호 연대하거나 경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각본없는 드라마’가 연출해 낸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대척점에 서는 게 정치인의 인연이기도 하다. 동반자인가 싶은데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영원히 갈라선 줄 알았는데 다시 다가서 손을 잡는 일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정치 상황과 여건의 변화, 그리고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정치인의 행태는 인연을 만들고 때론 악연으로 이어진다. 한국 정치사의 ‘인연’과 ‘악연’을 살펴봤다.
두 사람의 악연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누리당 전신인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1, 2위로 맞붙은 당시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후보를 누르며 사실상 ‘대통령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 전 대표가 아들 병역기피 의혹으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이 위원장은 경선에 불복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출마를 강행했다.
결국 보수 표가 분산되면서 유력후보였던 이 전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약 40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당시 이 위원장이 500만여의 보수성향 표를 가져가 정치권 주변에서 “DJ 당선의 1등 공신은 이인제, 이회창의 최대 역적은 이인제”라고 회자되기도 했다. 이 전 대표에게 이 위원장은 ‘15대 대통령’의 꿈을 앗아가고 ‘대선 3수생’이라는 치욕을 안겨준 장본인인 셈이다.
그 후 이 위원장도 잦은 당적 변경과 무소속을 넘나들며 대표적인 ‘정치철새’로 낙인찍혔다. 이런 악연으로 두 사람은 여의도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꺼렸다. 이 전 대표는 사석에서 ‘이인제’ 이름 석자만 나와도 얼굴이 굳어질 정도였다.
전 대변인은 박 전 위원장이 당 대표 시절인 17대 총선 직전 한나라당(옛 새누리당) 대변인으로 영입돼 ‘복심’으로 불렸다.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전 대변인은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막바지에 이명박캠프로 건너가면서 박 전 위원장과 결별한다.
친박(친박근혜) 인사들은 전 대변인을 향해 ‘배신자’‘변절자’라고 비판했고, 전 대변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조폭같은 충성심으로 누구를 우상화하는 것이 우리 정치를 망쳤다”며 박 전 위원장을 겨냥했다.
전 대변인은 새누리당을 탈당한 후 국민생각에 입당, “박 전 위원장은 책을 읽지 않아 지적인식 능력이 의심스럽다”“클럽 갈 때도 왕관을 쓰고 갈 것 같다”고 맹비난을 퍼부어 왔다.
이 의원은 유신시절 세 번 구속됐는데 그 중 한 번은 박 전 위원장과 관계가 있다. 1979년 경북 안동댐에 들렀던 이 의원은 새마을봉사단 총재였던 박 전 위원장의 방생기념탑을 보고 “이것이 유신독재의 실체다”고 비판했다가 구속됐다.
두 사람은 2004년 8월 전남 구례에서 열린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적도 있다. 17대 총선에서 ‘탄핵 후폭풍’을 뚫고 박 전 위원장을 중심으로 단합을 꾀하기 위한 연찬회였다. 이 자리에서 이 의원은 박 전 위원장을 겨냥해 “왜 친일이나 유신 문제만 나오면 쉬쉬 하느냐”면서 ‘독재자의 딸’이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박 전 위원장이 “왜 지난 선거 때 도와 달라고 했느냐.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3공·5공이 당의 뿌리인지 모르고 들어왔느냐.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대표를 흔들려면 아예 나가라”고 맞선 일화가 있다.
끝까지 손 잡기 어려울 것 같았던 두 사람은 YS의 DJ 병문안을 계기로 막판 극적으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거 YS와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투쟁 동지로 재야세력의 한 축을 이뤘다. 지난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 활동 당시를 비롯해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시기에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이들은 대척점에 서게 됐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각각 보수세력과 민주세력으로 상징되는 동시에 영남과 호남의 대표 정치인으로 거론됐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물과 기름’으로 비유했다.
DJ서거 후 YS는 위로 만찬 초청 의사를 밝혔고, DJ의 동교동계가 이를 흔쾌하게 수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87년 갈라선 이 후 두 계보가 20여년 만에 화해의 자리에 모인 것인데 저녁 값만 1000만원 정도 나왔다고 한다.
박 전 의장은 새누리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과 관련해 사퇴를 선언했고, 박 전 대표는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극명한 마지막 뒷모습이다. 동갑내기(1938년생)인 두 사람은 1957년 함께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며 1961년 나란히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검찰에 몸담았다.
이들은 각각 민정당, 평민당 소속으로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국회에서도 법사위원, 정당 대변인, 원내총무 등을 같은 시기에 역임하며 호흡을 맞췄다. 여야 대변인 시절 박 전 의장과 박 전 대표는 TV 토론에 종종 함께 등장해 ‘맞수’로 자리매김했다.
심 전 대표는 민주노총 설립에 참여하고 최초의 산별노조인 금속연맹을 결성한 뒤 2004년 총선을 통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유 전 대표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낸 뒤 2002년 개혁당을 창당했다가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경기 고양 덕양갑 재선거에서 당선돼 정치권에 첫발을 디뎠다.
두 사람은 비리경선 수습과정에서 구당권파의 비이성적인 행태에 대항하면서 ‘합리적 개혁주의자’로 재평가 받았다. 5·12 중앙위 회의에서 폭력이 벌어졌을 때 유 전 대표가 심 전 대표를 몸으로 보호하는 등 ‘신사도’를 발휘해 잔잔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