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 신파로 재조명…초연의 아쉬움 완성도 더해
적막한 불당 안, 칠흑같은 어둠 속에 중년의 승려가 홀로 불공을 드리고 있다. 그리고 객석을 가로질러 승려를 찾아온 사내는 홀로 대사를 쏟아내다 급기야 헛기침을 해대며 자신이 방문을 알리지만 승려는 답이 없다. 사내의 고군분투에 객석이 초토화될 무렵 승려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초연하게 사내에게 몸을 돌려 목례를 한다. 우리의 아픈 역사 5·18을 ‘21세기 신파극’이라는 과감한 시도로 재조명한 연극 ‘푸르른 날에’의 출발이다.
‘푸르른 날에’는 입이 떡 벌어지게 똑똑한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에 웃음을 더해 쉽게 재해석하면서 벌어지는 실수도 없다. ‘푸르른 날에’의 웃음은 당시를 공감하지 못하는 신세대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 딱 그만큼의 정도를 정확히 지켰다. 과도한 희화로 당시 광주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아버지 세대들에게 불쾌감을 안기는 과오는 찾아볼 수 없었다. 5·18을 처음 접하는 아이세대, 아픔을 간직한 아버지세대 모두에 기분 좋은 충격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시 만나는 감동 = 차범석 희곡상 제 3회 수상작인 ‘푸르른 날에’는 앞서 지난 2011년 5월 서울시창작공간 남산예술센터의 드라마센터에서 초연된 이후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다. 1년 만에 돌아온 ‘푸르른 날에’는 초연의 아쉬움으로 남겼던 거친 장면들은 섬세함을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 주인공 남녀의 신파 역시 좀 더 통속적으로, 좀 더 디테일하게 표현돼 재관람 관객에게도 만족도를 안길 법하다.
◇연극 '푸르른 날'에는… = 차밭이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승려 여산(과거의 오민호)은 조카이자 ‘딸’인 운화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그의 기억은 30여 년 전 전남대를 다니던 야학 선생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민호는 전통찻집 아르바이트생인 윤정혜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정혜의 동생 기준은 민호를 친형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 항쟁이 터지고 그 소용돌이 속에 정혜는 민호를 떠나보내고 도청을 사수하던 민호와 기준은 운명이 나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자가 된 민호는 고문 후유증과 함께 정신이상을 겪고 삶을 포기한다.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진흙탕이고 거부하고 싶은 생. 결국 민호는 속세의 자신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다. 민호와 정혜 사이에 생긴 딸 운화를 친형 진호가 거두었지만, 세월이 흘러 운화의 결혼에 이르러서는 끊을 수 없는 속세의 인연에 애달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