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혁 금융부장
한국은행 발표 자료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면서 던진 메시지는 소비위축을 초래할 정도로 가계부채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가계부채 증가가 저축률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실물경기 변동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계부채가 당장 경제에 치명타를 주진 않겠지만 채무부담 증가→내수위축→소득축소→채무부담 증가의 악순환으로 실물경제가 위축된다는 지적이다.
가계부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아
한은이 그동안 큰 관심을 안 보였던 가계부채를 화두로 삼은 건 김중수 총재 제안에 따른 것이란 후문이다. 김 총재가 부채경제학 관점에서 가계부채를 점검해보자고 제안했고 이에 한은 계량모형부장 등 14명이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10여개월간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이란 책무가 부여된 한은이 가계부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시장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계부채 보고서가 시기적으로 방법론적으로 적절하냐는 의문이 생긴다.
지난 1997년에 개정된 한국은행법은 물가안정을 유일한 통화정책의 목표로 상정했다. 지난해 8월 한은법을 개정해 금융안정 책무를 추가로 부여했지만 물가안정은 역시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러나 한은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물가관리에 실패했다는 게 세간의 시선이다.
MB 정부 초반에 한은을 맡고 있었던 이성태 총재 때부터 이상 조짐이 보였다. 2010년 1월 기획재정부는 11년 만에 허경욱 차관을 금통위 회의에 보내 ‘열석발언권’을 행사했다. 이를 놓고 언론에선 성장을 중시한 정부가 금리정책을 컨트롤 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허 차관이 참석한 이날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11개월째 2%로 동결했다.
이후에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걱정하며 금리인상을 촉구했다. 그러나 성장에 집작을 보인 정부는 강압적(?)으로 기준 금리를 계속 묶어 놓았다.
이는 한은 금통위 회의록에 그대로 남아있다. 2010년 9월 금통위 회의에서 당시 김대식, 최도성 위원은 “2분기 성장률이 7.6%, 물가는 3%를 넘은 만큼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2.25% 동결이었다.
한 달 뒤 열린 10월 금통위 회의도 마찬가지다. 최도성 위원은 “물가가 3%를 중반을 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시 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금통위가 무기력한 행진을 해 나가는 사이에 가계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1100조원을 넘어섰다. 이자가 싸다는 이유로 너도 나도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린 것이다. 가계부채가 급증하자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총수요 관리에 나섰지만 부채의 질(質)만 나빠지는 역효과만 발생했다.
이미 엎어진 물이지만 금통위가 2년 전 금리를 몇 차례 올렸으면 지금 경제는 어떻게 됐을까.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만약 그랬다면 물가를 잡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고, 경기진작 정책을 펴는데도 입지가 상당히 넓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 활성화 시키는 게 근본 해법
한은이 가계부채를 놓고 ‘뒷북 고민’을 하는 사이에 가계부채 문제는 한은 손을 떠났다. 금융위나 금융감독원 관리·감독 체제에서도 벗어나 버렸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부서에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가계부채를 금융이나 금리정책으로 해결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금융당국자들도 시인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무턱대고 수요와 공급 논리로 접근하거나 금리를 조정해 해결하려 한다면 뇌관을 건드리는 우(遇)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문제를 연착륙시키기 위해선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게 근본 해법이다. 소득을 늘려 부채상환 부담을 줄이고,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꽁꽁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 시키는 게 중요하다. 금융당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출 만기구조 장기화나 고정금리 대출 비중 확대 등은 연착륙을 위한 방법론 중 하나일 뿐이다.
때마침 금통위가 새 진용을 갖췄다. 새로 출범하는 금통위는 정치·경제적으로 산적한 현안에 직면해 있다. 그 중엔 가계부채 문제도 포함돼 있다. 이미 꼬일대로 꼬여 버렸지만 지난날을 반면교사로 삼아 가계부채가 경제위기로 전이되지 않도록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