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닿는 선 '고위공직자' 그들을 모셔라

입력 2012-03-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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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에 기업정서까지 악화로 완충지대 역할 필요…사외이사 선임 혹은 직접 영입

최근 한 헤드헌터 사무실에 긴박한 요청이 들어왔다. 고객은 A그룹 대관팀이었다. 대기업 대관업무를 할 수 있는 인사를 구해달라는 것이다. 조건은 공정거래위원회 대관업무 경력이다. B그룹도 오너의 지시로 대관팀 인원을 3배 가량 늘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대기업들은 자신들을 압박하는 정책과 이슈들이 쏟아지면서 대관업무를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과거 대기업을 감시했던 고위공직자 출신들은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대기업들의 사외이사직 러브콜을 받고 있다.

A그룹 한 관계자는 “총선과 대선에 대기업 정서까지 악화되면서 관련 이슈에 신속하게 쿠션(완충)역할을 할 인물이 필요한 때”라며 “고위공직자 출신들을 접촉하고 영입하는 것도 핵심 업무 중 하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슈에 맞는 인물 필요”=최근 고위공직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대기업 중 눈에 띄는 곳은 SK그룹과 현대차그룹이다.

SK그룹 윤리경영부문장을 맡고 있는 윤진원 부사장과 SK텔레콤 김준호 센터장은 검사 출신, SK텔레콤 남영찬 상임고문과 SK에너지 강선희 전무는 판사 출신이다. 최근 오너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SK그룹에 대해 ‘법조타운’이라는 별칭도 나돈다고 한다.

현대글로비스도 주주총회를 통해 회사 이슈와 직접 연결된 부처인 검찰과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출신들을 한꺼번에 영입할 예정이다. 이정수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와 이동훈 법무법인 에이펙스 상임고문, 석호영 삼화왕관 대표이사다. 이 변호사는 대검 차장 시절 검찰총장 후보로도 거론된 인물이다. 이동훈 고문은 공정거래위원회 기업협력단장과 카르텔정책국장 사무처장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석호영 대표는 국세청에서 납세보호과장, 전산기획 담당관, 납세지원국장 등을 거쳤다. 현대글로비스가 갖고 있는 일감몰아주기 이슈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처 출신들이라는 점은 선임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1990년대 10대 그룹들은 직접적인 실세인 장관급과 거물 정치인을 선호했다. 정권 핵심부와 직접적인 연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대기업들이 수직계열화를 통해 그룹 계열사 구조를 만들면서 사업부문별 업무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도 상징적인 장관급과 정치인 출신 대신 1~4급 정도의 실무 경험이 있는 고위 공직자의 필요성이 커졌다.

특히 올해처럼 대기업 정책변화와 오너 리스크가 클 때는 고위공직자 출신들은 대응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직접적인 메리트가 있다. 최근 대기업 곳곳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통계자료에서도 대기업들이 이슈와 관련된 부처 출신들을 영입해 회사 대관 업무에 활력을 넣으려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해 6월말 현재 총수가 있는 30대 그룹 1140개 계열사의 사외이사 중 고위 공무원 출신이 전년대비 52명이 늘어난 308명으로 집계됐다.

출신별로 보면 판·검사 출신은 올해 97명으로 전년대비 13명 늘었다. 국세청 출신도 전년보다 12명 늘어난 46명으로 파악됐다. 또 금감원이 8명에서 12명, 공정위가 11명에서 13명, 감사원은 8명에서 10명으로 각각 증가했다. 외교통상부 출신이 3명에서 8명으로 급증한 점도 눈에 띈다.

반면 일반 기업체 임원이나 대학교수 등 비공무원 출신 사외이사는 지난해 522명에서 올해 491명으로 31명 줄었다.

◇ 진짜 역할은?=대기업들이 사외이사직 등을 통해 영입한 고위공직자들의 진짜 역할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대기업 오너와 경영진들의 최대 난제는 정부의 각종 기업 정책과 사정 리스크다. ‘대관업무’가 빼놓을 수 없는 기업 경영의 핵심으로 떠오른 이유다.

특히 대기업 관련 기관인 기획재정부와 검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은 구성원 간의 끈끈한 연대관계를 유지하는 철옹성으로 통한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직원들로만 구성된 팀으로 철옹성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들 기관의 고위공직자 출신들을 영입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 대관업무 수요에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진다.

이에 대해 회사 측에서는 전문성 등을 갖춘 인사들로 이사회 활동을 통해 경영진의 감시와 견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C그룹 홍보팀 관계자는 “기업내부의 윤리경영, 투명경영 등을 위해 현직에서 기업을 감시했던 고위공직자 출신 들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의문이다. 지난 2010년 시가총액 상위 100사에 속하는 대기업집단 상장사 79개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은 2013건이다. 이 중 사외이사들의 반대로 부결된 안건은 1건에 불과하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이 지배주주들의 경영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상장회사가 사외이사를 선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1998년부터 국내 유일의 사외이사 인력풀인 사외이사 인력뱅크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사외이사 인력뱅크에는 현직 사외이사는 물론 전·현직 경영인, 교수, 회계사, 변호사 등 791명의 전문인력이 등록돼 있다. 사외이사 등록자 현황을 보면 전·현직 경영인 409명, 교수 167명, 회계사·세무사 98명, 변호사 60명 등이다.

그러나 등록 인사 중에 현재 51개 상장사에서만 사외이사로 선임돼 활동하고 있는 등 활용률이 5%에 불과한 실정이다. 협회 차원에서 철저하게 검증된 인사들이 정작 기업들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기업 오너와 경영진들이 사외이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반증이다.

◇ 영입 첫 단추는 대관팀=고위공직자 출신 영입은 이사회의 후보 결정-주주총회 의결 과정을 거친다. 이는 표면적일 뿐이다. 고위공직자들의 영입은 사실상 오너와 경영진이 전 과정을 관장하는 경우가 많다.

자산규모가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상장사 218곳 중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두고 있는 곳은 103곳에 불과하다. 또 그나마 법상 의무적으로 추천위원회를 설치한 회사 86개사 중 위원회에서 경영진을 배제한 곳은 13곳 뿐이다. 경영진들이 직접 사외이사 후보를 결정해 주주총회를 통해 선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밑작업은 보통 대관팀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대기업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기업 대관팀들은 평소 동종업계의 정보파악과 정책입법화 대응을 위한 국회 상임위와 정부 부처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력 업무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일 뿐이라는 것이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관팀의 핵심업무는 본사 경영진과 고위공직자 등 실세를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도 포함돼 있다.

본지가 입수한 한 대기업의 대관 업무자료를 보면 대관팀의 교량 역할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업무자료에는 해당 부처를 밀착 관리해 경영진의 입장 전달과 전방위로 대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게다가 정부 부처의 주요 포상 대상에 회사 경영진이 포함된 것을 업무 성과로 명시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대외적인 리스크를 파악해 사전관리를 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경영진과 고위공직자들을 연결하는 고리를 만드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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