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뿌리를 찾아서]⑫한진그룹-인천 해안동 한진상사

입력 2012-02-0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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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한 대로 시작한 수송 외길, 5대양 6대주를 누비다

▲1950년대 인천에 위치한 한진상사의 창고 모습.
종합물류기업인 한진그룹의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의 창업이념과 ‘신뢰’라는 경영철학으로 우리나라의 운수사업을 일으켰다. 산업경제의 혈관과도 같은 수송사업으로 ‘한진’을 육해공을 넘나드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그중 대한항공을 글로벌 국적항공사로 키워낸 것이다.

‘수송백화점’ 한진의 첫 단추는 인천시 해안동에서 시작됐다.

◇트럭 한대로 출발한 기업의 뿌리 = 부친의 사업 실패로 휘문고보를 중퇴한 15살의 조 회장은 국비교육기관인 경남 진해의 선원학교 해원양성소에 입학했다. 이후 선박기술을 익히고 싶었던 조 회장은 20살에 일본 조선소에 입사해 화물선을 타고 중국, 동남아시아 등을 떠돌며 드넓은 대륙에 ‘자신의 위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품는다.

5년 후인 1945년 11월, 조 회장은 인천시 해안동에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의 간판을 내건다. 그의 나이 불과 25살이다.

그가 한진의 뿌리를 인천에서 내린 데는 인천이 무역업에 최적의 장소라는 당시의 판단 때문이다.

조 회장은 부산은 수출항으로 발전한 반면 인천은 부산과 함께 남한의 대관문, 즉 수입항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이용했다. 인천이 지리적으로 서쪽의 중국과 마주하고 있는 데다 한강 유역에 걸친 수도의 관문으로 각종 산업물자가 조달되는 곳이라는 것. 그는 인천을 근거지로 삼아 중국을 겨냥해 무역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여건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남북한 분단으로 경제적인 교류까지 단절돼 남북의 경제상황이 모두 불완전한 상태로 추락한 데다 해방직후 대외무역에는 많은 규제가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을 침착하게 바라보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던 조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남북한 자동차 수는 전국적으로 약 8000대. 국내 경제가 이미 자유경제로 전환한 시점에서 빈약한 인프라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사업, 곧 운수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조 회장은 ‘수송’만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인체의 혈관처럼 작용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기간산업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진상사는 조 회장의 집념 끝에 창업 2년 동안 꾸준히 성장가도를 달리며 1947년 차량 10대를 보유했고 창립 5년만에 종업원 40여명과 트럭 30대 보유하게 됐다. 수송왕에 대한 꿈의 깃발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중훈 회장은 1969년 3월6일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을 거행했다.
◇그룹의 면모를 찾아가는 한진상사 = 한진상사가 중소기업 규모에서 한참 발돋움할 무렵, 암흑기가 찾아온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조 회장은 그러나 전쟁의 혼란속에서 한진상사가 보유했던 차량과 시설 등 기반시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폐허 위의 건물에 한진상사의 깃발을 다시 내걸었다.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6·25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사업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것처럼 조 회장 역시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며 한진을 명실상부한 기업으로 그 틀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조 회장은 특히 전쟁 직후 미군 보급물자 수송 사업에 집중했다.

1956년 7만 달러 수송 계약을 체결하며 미 8군과 인연을 맺은 그는 10년 뒤인 1966년 미군과 다시 79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당시 국내 업체가 베트남에서 수주한 최대 규모의 용역이었다.

이같은 군수물자 용역사업으로 한진은 미군이 철수한 1971년까지 5년 반동안 베트남에서만 총 1억5000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했다. 이 기간동안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200달러였다.

수송에서 얻은 이같은 자신감과 성과로 한진은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하며 수송 영토를 확장했다.

1967년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해 해운업에 진출한 데에 이어 그해 9월 5억7000만원에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한국공항, 같은해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를 품에 안았다.

특히 1969년 초라하게 운영되던 대한항공공사의 인수, 1977년 5월 대진해운의 해상 컨테이너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한진해운으로의 재탄생 등으로 한진상사는 육해공을 넘나드는 종합물류대기업 ‘한진그룹’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항공공사…글로벌 수송기업으로 = 조 회장은 대한항공공사 인수 당시 납입 자본금 15억원을 액면가대로 계산해 5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하고 공사 누적 적자를 포함한 부채 등 27억여원을 그대로 떠맡았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대한항공공사를 이같은 악조건에 떠안은 데에는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이며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는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이 아니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설득도 있었지만 조 회장 나름의 경영철학과 소신 때문이었다.

조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항공공사의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하나의 소명이었다고 언급했다. 한진상사가 창립 23주년을 맞은 1968년 11월 1일, 조 회장은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결정했다.

결국 조 회장은 사업에 대한 자신만의 집요함과 철학으로 1971년 4월 서울∼도쿄∼LA행 화물기를 띄우며 미주노선에 첫발을 이어 이듬해에는 서울∼도쿄∼호놀룰루∼LA에 정기 여객기를 취항했다.

대한항공은 민영화 3년만인 1972년 처음으로 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며 적자난에서 탈출했고 1973년에는 8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40여년 전 우리나라 국적기 역사상 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넌 대한항공은 현재 40개국 118개 도시를 취항하는 글로벌 항공사로 자리리매김 했다. 대한항공의 지난해 매출은 약 12조원.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세계 항공수송 통계’에 따르면 대항항공은 현재 화물 부문은 세계 2위, 여객 부문은 13위에 올라있다.

◇기업의 뿌리에서 시작된 ‘한진’의 날개 = 우리나라 현대사의 급격한 변화 만큼 기업의 역사도 경제개발정책에 따라 사업영역을 넓히다 몰락하는 등 명멸해왔다. 그러나 한진그룹은 60-70년대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에도 줄곧 10대 기업 자리를 내주지 않고 유지해왔다.

글로벌 물류기업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있는 한진그룹의 발전은 조 회장 특유의 경영철학에 뿌리를 둔다.

조 회장은 특히 현장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도 남달랐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후 새로 출범한 민항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사업에 대해서 만큼은 철저하게 파악하고 싶었던 조 회장은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을 누비며 정비현장을 수시로 찾아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항공기 엔진에 대한 관련 지식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싶은 유별난 호기심도 작용했다.

어려서부터 기계를 유독 좋아해 신기한 것을 보면 만지고 뜯으며 이치를 알아내려는 조 회장을 보고 부친은 동(動)과 정(靜)의 조화를 이루라는 뜻에서 ‘정석’이라는 아호를 지어줄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수송과의 인연을 지키며 ‘수송왕’의 길을 걷게 한 결정적인 경영철학은 신뢰와 자금관리 그리고 타이밍이었다.

조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신뢰와 자금관리를 철저하게 지키며 회사를 운영했다.

조 회장은 “한진상사의 사업이 순항한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고객에게 신용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돌이킬 만큼 신용을 경영의 최대 무기로 삼았다. 또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초기에 자금을 몰아넣어 뒷심이 부족한 사업보다 치밀한 계획으로 자금을 균형있게 회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현상유지에만 급급하면 오히려 낙오자가 되거나 곧 도태되고 마는 것이 기업세계의 냉엄한 현실. 이에 조 회장은 경영자의 시야, 즉 대세를 읽고 정확하게 판단해 미래를 예측하고 타이밍을 포착하는 능력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특히 그는 타이밍이랑 누구도 만들어 주지 않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경제와 세상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 정확하게 간파한 경영전략과 투철한 경영철학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수송업에 대한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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