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업 구상 조홍제 폐업 직전 회사 얻고 '훨훨'

두 발로 페달을 밟으면 말 만큼이나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게다가 말랑말랑한 고무바퀴는 터지지도 않는 것이 단단하기까지 했다. 그 신기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도로에 고무바퀴, 즉 타이어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시절이다.

1940년대 들어 일본은 한반도를 기지로 삼아 대륙 진출을 꾀했다. 이를 위해 조선 안에 타이어 제조공장이 필요했고 1941년 일본 ‘브리지스톤’이 한국에 진출했다. 1941년 3월 ‘조선다이야 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고 이듬해인 1942년 당시 경기도 시흥군에 속했던 현재의 영등포 인근에 공장을 세웠다.
당시 조선다이야 영등포 공장이 들어선 곳은 현재 신도림 역 인근이다. 경인공업지구에 속했던 이곳은 공장 부지로는 최적지로 꼽혔다.
가장 먼저 공장부지의 첫 과제인 교통이 원활했다. 경인선 철도와 경부선이 교차하는 덕에 원재료 수입과 완제품의 지방공급이 쉬웠다.
나아가 안양천과 도림천 등 주변에 산재한 하수시설도 공장부지로 적합했다. 지금은 도심 한복판이지만, 당시 ‘영등포 도림리’는 서울 외곽이었다. 덕분에 전력수급 시설을 건설하거나 직원들을 위한 사택건설 부담도 적었다. 무엇보다 땅값 부담도 적었다.
조선피혁과 동양방직 등 대규모 공장들이 서울 근교에 들어섰으나 14만평의 넓은 부지를 갖춘 곳은 조선다이야가 유일했다.
그렇게 준공된 조선다이야 영등포 공장에서는 트럭과 자전거 타이어를 합쳐 하루 300개, 연간 11만개의 타이어를 생산했다.
2011년 현재 한국타이어 대전과 금산 공장에서는 하루에 13만개의 타이어가 쏟아져 나온다. 창립 초기 1년 동안 생산된 타이어를 오늘날에는 단 하루 공정으로 만들어내는 셈이다. 회사가 70년의 역사를 써내려오는 동안 몇 배의 성장을 이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장시설의 70% 이상이 파괴되는 시련 속에서 직원들은 힘겨운 재건 작업에 나섰고 1955년 조선다이야 공업주식회사의 이름도 ‘한국다이야’로 교체됐고, 1958년 마침내 공장을 정상 가동시켰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공장은 산업수요 급감과 원재료 수급난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경영부실에 빠진 한국다이야는 결국 회사문을 닫기 직전까지 몰렸다. 공장 문을 닫아야할 상황에 한국타이어는 극적으로 새 주인을 만났다. 바로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이다.
1906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조 회장은 1930년대에 일본 유학을 마친 인재였다. 젊은시절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당시 청년 실업가 이병철 회장과 친교를 맺었다. 마침내 이 회장과 1948년 공동으로 출자해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삼성 그룹이 성장해가던 무렵인 1962년 조 회장은 독자적인 사업의 꿈을 펼치기 위해 이병철 회장과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삼성을 떠났다. 그리고 1962년 효성물산을 모체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조 회장은 경영부실 상태에 놓인 한국타이어를 인수한다.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앞세운 조 회장은 효성그룹을 중심으로 20여개의 대기업 군으로 회사를 성장시켰고 한국타이어 역시 산업혁명 붐을 타고 본격적인 성장기에 돌입했다.
1984년 1월, 조홍제 회장이 눈을 감기까지 한국타이어는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애정을 쏟았던 계열사였다.
이병철 회장과 마지막 악수를 나누고 삼성을 떠나 효성물산을 꾸렸던 조홍제 회장은 한국전쟁 이후 쓰러져가던 ‘한국다이야’를 인수해 오늘날 세계 수위의 타이어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평소 조 회장이 신념처럼 여겼던 ‘기업은 사람이 하는일이므로 기업인 역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철학은 오늘날 한국타이어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