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혁 부국장 겸 금융부장
폴리페서(polifessor)는 정치를 뜻하는 ‘politics’와 교수를 뜻하는 ‘professor’가 합쳐진 조어(造語)로 말 그대로 풀면 정치판에 뛰어든 교수를 일컫는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전후에 등장한 서울대 안철수, 조국, 박세일 교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단순 조력자에서 벗어나 선거판을 뒤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대중 앞에 등장했다. 이들이 여론을 주도할 수 있었던 건 SNS(Social Network Service)로 대표되는 新미디어의 힘이 컸다. 때문에 항간에선 이들을 ‘新폴리페서’ 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수들의 정치참여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박정희 경제개발’ 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서강학파’나‘ ‘DJ 노믹스’를 만든 ‘중경회’ 같은 것이 모두 대학교수들로 이루어진 브레인 집단이다. 이들은 상아탑과 정치권을 오고 가면서 한 시대를 이끌어 갈 경제정책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본격 등장한 정치교수 = 폴리페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노무현 정부 때다. 노무현 정부 들어 대학교수들이 대거 정치에 뛰어들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권력의 달콤한 맛도 봤다.
이후 이명박 정부 들어 ‘줄서기’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권력을 쫒는 교수들이 봇물을 이뤘다. 교수사회에서는 이를 놓고 ‘노무현 학습효과’ 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2002년 대선에서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소수의 교수 그룹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는 것을 보고 대선 주자 캠프에 줄을 서는 교수들이 대거 늘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공개된 교수만 400명, 비공개까지 포함하면 1000명이 넘는 교수들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뛴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공약이었던 ‘7·4·7 전략’과 ‘대운하 공약’이 바로 이들 폴리페서의 작품이었다.
누가 차기 대권을 거머쥘지 모르겠지만 다음 정권에서도 폴리페서의 활약(?)은 계속될 것이다. 특히 지금의 분위기로 봐서는 폴리페서가 권력지도의 흐름을 바꿀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교수들의 정치참여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학자라는 이유를 들어 연구에만 전념하라고 강요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일부 보수적인 지식인들은 학자는 학자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그것이 불문율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정치에 참여하는 교수들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다. 즉 폴리페서의 철학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려면 일단 신변정리부터 깨끗이 해야 한다. 교수직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보험으로 생각한다면 아예 정치판에 기웃거려선 안 된다. 적당히 권력을 향유하다 때 되면 다시 상아탑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 MB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몇몇 폴리페서의 경우 휴직(休職)처리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같은 양다리 걸치기는 사라져야 한다.
◇상아탑에 복귀하려면 재신임 절차 받아야 = 정치를 하고 싶으면 깨끗이 상아탑을 잊어야 하고, 행여나 후에 상아탑에 다시 들어가길 원한다면 다시 재신임 절차를 밟는 게 맞다. 그래야만 폴리페서들의 정치활동이 국민들에게 진정성 있게 보일 것이다. 교수건 정치인이건 자기 정체성을 잃으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를 직업으로만 생각하고 지연과 학연에 좌우 돼 출세욕을 채우려 해선 안 된다. 명분을 상실한 출세욕은 필연적으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 과거 지지후보를 3∼4번이나 바꾼 교수가 있고, 대선 기간 내내 후보 얼굴 한번 못 본 교수도 있었다는 건 그만큼 권력 줄서기가 횡행했다는 반증이다.
폴리페서가 참다운 정치를 하고 싶으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철학을 가꿔나가야 한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겸손하고 겸허하게 학문을 대하는 교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국민도, 권력도 가까워질 것이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선비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학처럼 살다 고비마다 현실에 참여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런 선비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수기치인(修己治人)’은 기본이다.
성공한 폴리페서가 되고 싶은가? 그러기 위해선 나(자신)부터 닦는 게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