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김탁환의 원고지’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온 세상이 달뜨던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소설을 집필하는 사이사이에 남긴 창작일기다. 출간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내면의 풍경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이 기록 속에는 예술가의 삶이란 게 과연 어떤 모습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책 속에 그려진 소설가 김탁환의 생활은 뮤즈와의 조우나 격정에 휩싸인 찰나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더 써야 한다. 더 집중해야 한다. 더 고독해져야 한다. 버텨야 한다.’며 자신을 다그쳤고,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고, 글을 쓰다 지쳐 잠들기도 했고, 쑤시고 아픈 몸을 견디며 창작과 퇴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꼬박 10년. 소설을 ‘쓰지 않을 때, 쓸 수 없을 때, 쓰기 싫을 때, 문득’ 써내려갔던 이 일기는 긴 시간을 거쳐 어느새 원고지 1000매를 훌쩍 뛰어넘는 서사시가 되었다. ‘김탁환의 원고지’는 그야말로 숨 막힐 듯 치열하고 지루하리만치 성실한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인 셈이다.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부터, 김탁환은 온전히 이야기에만 이끌려 살았다. 첫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부터 2010년 출간한 ‘밀림무정’까지 인간 김탁환의 삶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온갖 이야기들이 싱싱하게 날뛰고 종횡무진하는 소설 속과 달리 소설 바깥의 생활은 너무나, 지독할 정도로 단조롭고 평범했으므로. 그는 글을 쓰는 틈틈이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학생들을 가르쳤고, 글을 쓰다 지치면 다시 힘을 내기 위해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으며, 글을 쓰기 위해 대가들을 찾아가 배우고, 써온 글들을 개악의 순간까지 퇴고하기 위해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쯤 되니 이것이 인간 김탁환의 삶인지, 이야기의 삶인지 모호해진다.
“나는 없다. 있는 건 이야기뿐. 이야기들이 새벽에 일어나 일찍 학교가서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다가 밥을 먹고 또 자판을 두드리다가 밥을 먹고 또 자판을 두드리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잠든다. 그건 내가 아니라 이야기다.” (2003년 9월 18일의 기록 중에서)
이 책은 그간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작가 김탁환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주기도 한다.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창작과 퇴고 사이사이 떠난 취재여행은 모처럼 김탁환을 그 또래의 청년으로 돌아오게 했다.
김탁환은 빼어난 안목으로 이웃 예술작품 창작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산문들은 이 책이 단순한 창작일기를 넘어 달달한 문화기행 혹은 내면여행서로까지 확장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