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위기 재발에 각국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예산 편성이 서민과 복지 재원 확충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는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맞추겠다고 했지만 정부의 최근 행보로 볼때 정책기조는 성장보다는 복지쪽에 방향을 맞추고 있다. 이는 내년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강한 압박에 정부가 백기를 든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우리나라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최고 경제정책 수장인 박재완 장관의 최근 발언은 이를 방증하고 있다. 박 장관은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법인세ㆍ소득세 감세 유예를 오는 2013년까지 연장하고 2014년 이후 부터 원래 기조대로 감세를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면서“소득 구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왜곡구조를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이어“이 같은 사항은 차기 정부가 결정할 상황이라 너무 주제 넘는다는 애기라고 생각하지만 2013년 이후의 일들은 자세히 밝히지 않는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 장관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세 문제는 결정됐기 때문에 갑론을박 하지 말고 차기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현 경제수장으로서의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박 장관 발언 배경에는 역시 정치권의 압력이 강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대기업을 옥죄는 모습을 보여줘 그동안 대기업 위주의 부자 정치를 펼쳐 왔다는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정치권의 계산에 박 장관의 소신이 꺽인 것이다.
박 장관은 그 동안 시장과 자율을 중시하는 ‘MB 노믹스’에 철저하게 동조해 왔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재정부 장관인 강만수 장관과 윤증현 장관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박 장관은 부자 감세라는 비판을 받을 때 마다 기업 투자의욕을 고취시켜야 한다며 흔들림 없는 감세 정책을 펼칠것을 약속했다.
심지어 중장기적으로 세입 증대와 재정건전성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까지 했다. 하지만 박 장관의 이같은 철학은 불과 취임 100일 채 안된 시점에서 완전 뒤바뀌어 버렸다. 성장을 위한 감세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던 박 장관이 한나라당의 복지수요 증가에 따른 감세 철회 요구에 소신을 헌신짝 처럼 버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이유다.
감세 원칙론자로 유명했던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도 감세 철회를 막지는 못했다. 그는 최근 감세 철회에 대해 “감세는 현정부의 기조였지만 국회의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 것도 박 장관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따라 박 장관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반값 등록금과 저소득층 비정규직 4대 보험료 지원 등과 관련된 복지지향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요구를 속속 수용하고 있다.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를 위해 내년 1조5000억원과 비정규직 지원대책에 1조원의 예산을 투입키로 합의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또 한나라당이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기초노령연금 1조원 확대 예산도 합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치권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거나 앞으로 받아 들일 것으로 예상되면서 재정지출이 예산범위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재정지출은 올해 309조원보다 4.5~6.1%늘어난 약 323조~328조원이다. 최근 세법 개정안에 따른 법인세·소득세 등이 포함된 감세 철회로 내년 추가되는 세수는 약 1조원 뿐이다. 정치권과 합의한 복지예산 지출에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큰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에서는 부족한 세수를 사회간접자본시설(SOC) 지출을 줄여 확보하면 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정부는 올 연말 마무리되는 4대강 사업 예산지출이 사라지면서 3조원 가량의 예산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즉, 감세 철회와 SOC 예산을 줄여 4조원 가량을 확보한다면 복지예산 투입금액을 맞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일자리 창출 등의 높은 전후방 효과가 높은 SOC 투자 축소는 내수 경기와 고용 증대에 악영향을 초래하는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복지예산을 늘리면서 균형재정을 이루겠다는 목표에 빨간불이 켜졌다. 정부는 재정지출 증가를 억제해 오는 2013년까지 균형재정을 이루겠다는 계획이다. 재정지출 증가율을 재정수입 증가율보다 낮게 맞춰 간다는 것이지만 복지지향적인 정책으로 인해 정부의 목표 가능성은 떨어진다. 복지정책은 한 번 세워지면 해마다 수혜자가 늘면서 확대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정부의 복지예산 재정지출은 지난 2005년 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9.8% 늘었다. 이는 정부 총지출 증가율의 6.8%보다 높다.
정부는 법인세ㆍ소득세 최고세율 인하에 따른 세수 증가분 2조8000억원을 재정건전성 제고와 서민ㆍ중산층의 복지 재원을 확충하는데 사용할 계획이다. 7.4.7공약을 앞세우며 경제대통령의 칭송을 받던 MB정권과 청와대, 기재부 등 MB경제팀이 이처럼 성장을 버리고 복지로 정책 기조를 바꾼것은 한나라당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집권 하반기 레임덕 현상이 겹치면서 성장을 위해 투자를 강조하던 ‘MB노믹스’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부자정권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까지 꿋꿋하게 성장을 펼쳐오며 기업 프랜들리를 외치던 이명박 정부가 복지지향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은 집권 하반기에 오는 레임덕 현상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