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두려운 직장인들… 의견 제시 "꿈도 못꿔요~"
#.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조모(32)씨는 매주 월요일이 두렵다. 부장, 임원, 사장으로 이어지는 장장 3시간에 걸친 주간 회의 때문이다. 보통 훈계에서 시작해 야단으로 끝난다. 똑같은 소리를 세 사람에 걸쳐 들으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시간도 아깝다. 월요일은 특히 할 일이 많지만 회의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 장시간 회의를 해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의견 교환을 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훈육을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월요일부터 녹초를 만들어 버리는 회의. 조씨의 일주일은 다른 사람보다 길게 느껴진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회사에서 회의는 중요한 수단이다. 회의는 기업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잦은 문제들을 파악하고, 해결도 가능하게 한다. 또 구성원들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시너지 효과도 창출한다.
한때 SK그룹에서는 회의실을 해우소라 부르기도 했다. 회의를 하다보면 막혔던 난제들이 해결된다는 데서 붙였다고 한다.
실제로 잘 나가는 기업들은 회의 문화부터가 남다르다. 능동적이며 창의적이다. 전문가들은 무조건 상사의 지시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회의 문화는 결코 회사의 발전을 이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의 회의문화는 수동적이라는 직장인들의 불만이 많다. 의견을 내도 상사의 뜻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고, 회의 시간도 길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 즐거운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회의문화가 나타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일부이지만 이 같은 긍정적인 회의문화가 다른 중소기업들에게도 확산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직장인들 “결론 없이 질질 끄는 회의가 최악”= 우리나라 직장인들 10명 중 7명은 회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업포털 사람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 69.9%가 회의 때문에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스트레스가 없다는 직장인은 30.1%에 불과했다.
직장인들이 회의에서 스트레스를 느끼는 이유는 뭘까. 직장인들은 장시간 회의로 인해 시간을 뺏기는 것이 가장 불만이라고 답했다. 27.2%의 직장인들이 이 같이 답해 스트레스 원인 1위로 꼽혔다. 2위인 ‘결론 없는 회의가 많다’는 이유도 25.3%로 1위와 비슷한 비중을 나타냈다.
반도체 패킹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이모(28)씨 역시 회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특허그룹에 속해 있는 이씨는 회의 때마다 시간만 질질 끄는 회의를 경험한다. 회의를 이끌어 가는 과장은 회의의 핵심 주제에 벗어난 이야기들로 시간 끌기의 장본인이다. 이씨를 비롯한 부하직원들은 답답하지만 상사의 성격을 아는 지라 말도 못하고 속만 태우기 일쑤다.
이씨는 “회의란 게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건데, 매번 상사인 모 과장이 핵심을 흐려놓는다”며 “바빠 죽겠는데 결실 없는 회의로 인해 시간을 뺏기는 게 너무 싫다”고 하소연했다.
회의가 잘 진행된다고 해도 대부분 상사의 의견만 일방적으로 전달된다는 지적도 많다.
취업포털 인크루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53.9%의 직장인들은 상사의 의견만 전달되는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활발한 의견 교류를 하고 있다는 직장인들은 33.9%에 불과했다.
직장인 김모(30)씨는 “회의에 들어가도 대부분 상사의 뜻대로 진행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의견을 내고 싶어도 중간에 뚝뚝 잘라버리는 상사들 때문에 회의 시간 때 소극적이 됐다”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효율적인 회의문화= 모든 기업들이 위의 경우처럼 일방적인 회의 문화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일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능률적이면서도 창의적인 회의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8년 당시 이윤우 부회장이 ‘벽 없는 조직’을 선언하면서 회의와 보고문화를 일방적 지시가 아닌 토론 위주로 바꿨다. 삼성전자의 회의문화 ‘337원칙’도 이의 일환이다.
337원칙이란 회의 시 3가지 사고, 3가지 원칙, 7가지 지침을 줄여 만든 말이다. 가급적 간략하게 회의를 진행하고, 최대 한 시간 반을 넘지 않도록 제한하자는 게 주된 내용이다. 또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원들로만 회의를 진행하고, 참석 인원들은 모두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줌과 동시에 발표된 의견이 묵살되지 않도록 배려한다.
삼성전자에 다니는 직장인 이모(33)씨는 “매번 이 같은 원칙이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회사가 이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강해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화재 역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스탠딩 회의를 하고 있다. 우선 회의실 예약 체계를 30분 단위로 끊어 총 2시간 이내로 제한한다. 알람시계 등을 이용해 회의시간을 최대한 축소하고, 회의실 벽면은 내부가 모두 보이도록 교체했다.
LG전자는 ‘3-10-30’ 회의문화를 갖고 있다. 파워포인트 회의 땐 슬라이드를 3장 이내로 제한하고, 의제 발표는 10분 내로 해야 한다. 또한 이를 포함한 전체 회의 시간은 30분 내로 제한된다. 의견을 발표할 때도 결론을 먼저 제시하는 두괄식을 권장하고 있다.
해외기업들은 더욱 선진화된 회의문화를 보여준다. 미국 전기기기 제조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은 아예 회의 전문 진행자를 두고 회의를 진행해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미국의 컴퓨터장비기업 휴렛패커드(HP)는 매일 오전 10시 커피 브레이크를 갖고 사장부터 신입사원까지 거리낌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형식 없는 회의가 이뤄진다.
일본 광학기기제조업체 캐논(Canon)은 회의실 탁자 높이를 30cm 높임으로써 긴장감 있는 회의를 진행한다. 서 있는 직원들의 다리에 자극을 줘 회의에 집중하게 한다.
직장인 서모(29)씨는 “글로벌화된 일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회의문화가 선진화되는 건 환영할 만할 일”이라며 “무엇보다 중소기업에도 개선된 회의문화가 확산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