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아프리카의 진정한 흑진주
(편집자주: 남아공 월드컵으로 전세계 스포츠팬들이 열광하고 있는 가운데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 역시 고조되고 있다. 주식시장은 물론 경제 전반의 고성장에 힘입어 글로벌 자본이 아프리카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흑진주 케냐는 블루오션 중의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4회에 걸쳐 케냐 경제의 현황과 미래를 진단한다)
<글 싣는 순서>
① 케냐 증시가 뜬다...고성장ㆍ역동성 매력
② 오바마의 아버지의 나라 ‘오! 케냐’
③ 케냐에서 음료 및 원자재 업종도 뜬다
④ 케냐, 阿 관광대국 입지 굳힌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캐나다에 모인 주요 8개국(G8) 정상들은 아프리카 지역 정상들과 회담을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
특히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부친이 케냐 출신인 만큼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그는 “아프리카 18개국이 독립한지 5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아프리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해 현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설 뜻을 강조했다.
케냐를 포함한 아프리카 18개국은 유럽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벗어난 1960년을 ‘아프리카의 해’라 부르고 있다.
‘오바마의 아버지의 나라’로 한때 주목을 받았던 케냐. 이번에는 월드컵 열풍과 함께 검은 대륙의 보고(寶庫) 가운데 하나로 다시 한번 주목을 끌고 있다.
케냐는 북쪽으로는 에티오피아, 북서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우간다, 남쪽으로는 탄자니아, 동쪽으로는 소말리아에 인접해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7세기경 아랍인들이 케냐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고 1498년 이후에는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오면서 아랍인들과 포르투갈인의 치열한 세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1824년부터는 영국인들과 독일인들이 기독교 문물을 들고 들어와 몸바사 부근에서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후 1888년 들어온 영국의 동아프리카회사가 케냐의 무역을 독점한 데 이어 1895년 영국의 동아프리카 보호령이 내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 많은 백인들이 케냐로 들어오면서 1920년 6월에는 인도양 연안을 케냐 보호령으로, 그 밖의 지역을 케냐 식민지로 개칭하면서 케냐의 오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 등에 공통 통화를 사용하게 하고 그 밖에도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로 묶어 통치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에 시작된 케냐 독립운동단체인 ‘마우마우’의 필사적인 투쟁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마우마우’는 케냐 최대 부족인 키쿠유족이 결성한 반(反) 백인 테러단체로 이들의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켜 1963년 케냐는 영국에서 독립하게 됐고 1964년 12월 12일 드디어 케냐 공화국이 성립됐다.
그 한편으로는 자신의 출신 부족인 키쿠유족들만 우대하는 편파적인 정책으로 마사이, 루오 등 다른 부족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1974년에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종신대통령에 취임,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독재자의 길도 잠시. 케냐타 대통령은 1978년 노환으로 타개하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다니엘 모이가 그의 뒤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케냐의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 가량이 농업이다. 공업화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하면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정세 불안과 정치의 부패 및 비능률, 빈부 격차 확대로 경제성장률은 저조한 편. 지난 2007년 경제성장률은 7%였다.
수도 나이로비에는 유엔환경계획, 유엔인간거주계획 본부가 들어서 있으며 통신ㆍ금융ㆍ교통의 중심도시로 자리잡았다.
1996년 케냐는 탄자니아ㆍ우간다와 함께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관세와 인구이동, 인프라개선을 목표로 한 동아프리카 공동체를 만들었고 2004년에는 관세동맹을 맺었다.
한편 케냐에서는 육상ㆍ축구ㆍ크리켓ㆍ럭비ㆍ랠리ㆍ발리볼 등의 스포츠가 인기가 높다.
특히 장거리 육상경기의 인기가 높고 또 이웃나라 에티오피아와 함께 세계적 강호로 유명하다.
베이징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사무엘 완지루를 포함해 세계 대회 우승자가 자주 배출되고 있다.
다만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은 본선행을 일찌감치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