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권에 임원 책임 강화를 골자로 한 ‘책무구조도’ 제도가 작년부터 본격 도입되면서 내부통제 체계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책무구조도(Responsibility Map) 제도는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업 전반에 걸쳐 임원별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내부통제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장치로 높은 주목을 받는다.
정태경 삼정KPMG회계법인 상무는 지난달 22일 본지와 만나 “책무구조도는 단순히 책임을 나누는 것을 넘어, 질적인 내부통제 문화가 변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융기관 내부통제, 리스크 컨설팅 분야에서 20년 넘게 몸담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금융위원회로부터 개인 표창을 받은 인물이다.
1977년생인 정 상무는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 삼정KPMG회계법인에 합류해 자금세탁방지체계, 운영리스크, 준법지원시스템 구축 등 60여 건의 내부통제·리스크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증권, 보험, 여전사 등 다양한 금융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주요 경력으로는 2005년 KB국민은행 신용리스크 관리체계 도입을 시작으로 하나·DGB(현 iM)·BNK금융지주, KDB산업은행 등 국내 주요 금융기관의 내부통제 진단 및 개선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2018년 일명 '유령주식' 사태를 계기로 삼성증권 전사 내부통제 진단에 참여하는 등 금융사 내부통제 분야에 국내 최고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정 상무는 “국내 금융권이 지난 몇 년간 책무구조도 도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아직은 임원의 책무를 도출하고 점검항목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이제는 임원이 부서장에게 보고되는 실제로 각종 수치나 리스크 지표를 직접 점검시키거나, 금융사고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등 실질적인 내부통제 활동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지주사나 은행, 보험과 달리 증권사는 업무별 책임구조가 불명확한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힌다. 지난해 금융투자협회의 금융투자회사 책무구조도 초안 용역을 마무리한 정 상무는 금융투자회사의 특징에 대해 "중층적(혹은 계층적) 임원 구조가 많은 것"이라며 "중층적 임원 구조에서는 하위임원이 실질적 업무를 전담하고, 상위임원은 책임만 분산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물론 불필요한 책임을 받아서는 안되겠지만 누가 책무를 배분받든 간에 책무를 배부받은 임원이 이를 확실하게 관리할 수 있는 체계와 프로세스를 수립해야 한다"며 "책무의 배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임원이 실제로 책임을 이행할 수 있는 조직문화와 내부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은행은 여신담당 부행장이 여신업무를 총괄하는 등 내부통제 주체가 명확하지만, 증권사는 PF 등 특정 업무를 여러 임원이 나눠 맡고, 영업성과 중심 문화가 강해 내부통제 주체가 불분명하다"며 "책무구조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처럼 불명확한 책임구조를 명확히 하고, 부족한 내규, 내부통제 관리 기준을 보완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증권사 책무구조도의 본질은 영업부서 중심의 내부통제체계 도입이라고 봤다. 통상적으로 금융사고의 대책 및 내부통제 점검 활동은 관리부서를 중심으로 수행되며, 영업부서는 수익에만 집중한다. 특히 증권사는 은행 대비 영업부서의 수익 집중화, 성과에 대한 조직 내 압박 등이 심한 편이다.
정 상무는 “기존에는 준법감시인이나 금융소비자보호책임자 등 관리부서 중심으로 내부통제가 이뤄졌지만, 앞으로는 영업부서 임원도 자신의 책무와 관련된 법령·내부통제 기준을 직접 점검해야 한다”며 "IB그룹 임원은 자신의 책무에 기업공개(IPO) 수요예측 기준 준수, 각종 조서의 완비여부 등을 정기적으로 점검할 책임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금융투자회사 책무구조도 도입에 가장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증권사는 은행과 달리 영업부서의 수익집중 현상과 성과 압박이 심해, 영업 임원들의 내부통제 경험과 교육이 부족하다”며 “임원 각자가 자신의 업무에 대해 ‘작은 준법감시인’이 돼야 하고, 감독기관과 협력해 경험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공적 해외 사례로는 영국의 SM&CR(고위 관리자 및 인증 제도, Senior Managers & Certification Regime) 제도를 들었다. 정 상무는 “영국은 금융위기와 리보(Libor) 금리조작 사태 이후 고위 임직원의 개인 책임을 강화하는 제도를 도입했고, 이를 통해 내부통제 문화를 영업부서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래전부터 글로벌 금융기관은 ‘3단 방어체계(3 Lines of Defense)’(영업부서에 의한 자체관리-준법·리스크부서에 의한 모니터링-감사부서의 확인)를 운영하며, 영업부서에도 '내부통제 관리자'를 배치해 실질적 내부통제를 실현하고 있다”며 “한국도 영업부서의 내부통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책무구조도 정착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책무구조도는 단순히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조직문화와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할 것”이라며 “금융감독당국의 유연한 대처, 모범사례 공유, 적정한 책임을 수행한 임원에 대한 면책 선례 등이 제도 정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무엇보다 모든 임원이 내부통제를 자신의 업무로 인식해, 실질적으로 점검과 개선을 지속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상무는 “책무구조도의 성공은 조직 내 실질적 내부통제 문화의 변화에 달려 있다”며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변화의 시작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