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추운 봄날 저녁 풍경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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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3월 말이라 계절로는 확실히 봄인데도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까지 떨어져 봄처럼 느껴지지 않는 날이었다. 가까이 지내는 몇 사람이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행사랄 것까지는 없지만,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모임이라 딴에는 격식을 차리고 음식에도 신경 쓰게 되었다.

장소가 어느 일식집으로 정해졌다. 모임에 가기 전 옷을 두 번이나 갈아입었다. 계절만 믿고 그냥 봄옷을 입으니 왠지 추운 느낌이 들어 다시 두툼한 패딩을 꺼내입자 그건 또 한겨울 옷차림 같았다. 절충해서 가벼운 봄 양복에 가벼운 코트를 걸쳤다.

자리에 모인 네 사람 모두 인사를 하며 날씨 얘기를 했다. 그중에 나와 똑같은 사람도 있는 듯 누군가 오기 전에 옷을 두 번 갈아입은 얘기를 했다. 나도 그랬다며 대화가 자연 날씨 쪽으로 이어졌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점점 더 기온이 올라간다는데 요즘 날씨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얘기가 나왔다.

낮에 두 번이나 함박눈을 뿌렸던 날이라 봄 눈 얘기도 나오고 사월의 눈 얘기도 나왔다. 어린 시절 대관령에서 자란 나에게 봄눈은 정말 흔한 것이었다. 눈 내리지 않은 사월보다 눈 내린 사월이 더 많았고, 몇 년에 한 번씩은 오월에 내리는 눈을 맞기도 했다. 날씨가 고루 따뜻해지면 오월 초도 한여름 날씨 같다. 그런데도 대관령 꼭대기엔 아직 하얗게 눈이 남아 있을 때가 많았다. 봄은 그렇게 두 계절이 함께 지나가곤 했다.

준비된 음식이 나오자 다시 봄꽃 얘기가 나왔다. 일본음식점답게 붉은 매화꽃 그림 옆에 ‘동풍’과 ‘매화’와 봄을 잊지 마라는 뜻의 ‘춘망’과 같은 한자가 섞인 일본 시가 적힌 키가 작은 그릇이 차례로 나왔다. 모두 한 세트의 식기들인 듯했다. 그걸 보고 한 사람이 말했다. 이따금 일식집에 가면 꼭 이런 그림에 이런 시가 적힌 그릇들이 나오던데 이 그림의 의미와 글씨들의 의미가 무어냐고 물었다.

다행히 그런 쪽으로 밝은 친구가 있어 접시에 그려진 그림과 글에 대해 설명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동풍이 불거든 향기를 전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고 봄을 잊지는 말아라’ 하고 당부하는 시라고 했다. 다시 짧은 설명이 따랐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라는 사람인데, 일본에서는 학문의 신으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학문도 높고 명망도 높은 충신이었지만, 모반을 꾀했다는 모함에 빠져 돌아올 기약 없는 귀양길로 떠나며 자기 집 매화에게 남긴 시라고 했다.

짧은 시지만 그것을 해석해주고 사연을 알려주는 사람의 솜씨가 좋아 어느 날 귀양길에 자기 집 정원의 매화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학자의 구구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잘 전해졌다. 어디 헤이안시대의 일본뿐이었겠는가.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단 귀양을 가면 그곳에서 목숨을 부지한다 하더라도 다시 살아 돌아오기는 어려운 법. 시를 남긴 학자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고, 해마다 주인 없는 집에서 피는 매화는 그런 주인의 심정을 알았을까.

그러자 누가 다시 우리의 고시조 한 수를 읊었다.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찾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똥말똥하여라.’ 이 시조는 평양 기생 매화가 춘설이라는 동료 기생에게 정인을 빼앗기고 탄식하며 읊은 시라고 한다.

옛벗들이 오랜만에 모여 지난 정을 나누고 지난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사람은 따뜻하고 반가워도 날씨가 봄이 되어도 봄 같지 않아 겨울 같은 봄 속의 매화 얘기를 나누었다. 날씨는 추워도 분위기로는 어느 자리보다 따뜻한 어느 봄날 저녁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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