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알랭 들롱, 고독한 킬러의 원형

입력 2024-09-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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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립 동국대 명예교수ㆍ영화영상학과

<‘사무라이’, 장 피에르 멜빌 감독, 1967년>

알랭 들롱이 주연한 영화 ‘사무라이’(1967·국내에는 ‘고독’으로 더 알려져 있다)는 고독하면서 ‘쿨’한 킬러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후 수많은 모방이 나왔다. 한국 영화 중에는 이병헌의 ‘달콤한 인생’(2005)이 좋은 예다. 사실 이제 조폭 영화에서 킬러가 포커페이스를 하지 않는 경우를 찾기 힘들 것이다. 킬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 같다. 영화 ‘사무라이’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제프 코스텔로(알랭 들롱)가 황량한 자신의 방에서 침대에 누워 담배 피우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의 그날 임무는 한 나이트클럽에 가서 사장을 죽이는 것이다. 그전에 그는 알리바이를 치밀하게 꾸민다. 임무는 간단히 끝난다. 하지만 사장실을 나오면서 그 클럽의 피아니스트인 발레리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발레리는 그러나 경찰서에서 예상외로 제프가 범인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그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인가 아니면 살인을 의뢰한 조직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인가, 분명하지 않다.

경찰서를 나온 제프는 미행을 따돌리고 돈을 받으러 간다. 그러나 조직은 한 번 체포된 그를 믿을 수 없어 제거하려고 한다. 실패하자 그들은 마음을 바꿔 그에게 거액을 주며 ‘마지막’ 청부를 한다. 그 대상은 바로 발레리다. 제프는 조직의 보스를 찾아내어 죽이고 발레리가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간다. 그는 입구에 모자를 맡기고는 받은 번호표를 그냥 내려놓는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의미다. 그는 피아노 앞의 발레리에게 간다. 총을 꺼내 겨눈다. 그러나 매복한 경찰들의 총격에 쓰러져 죽는다. 형사는 그의 총의 탄창이 비어있는 걸 발견한다.

‘사무라이’의 이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흔히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한다.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에 의미가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신은 죽었다”는 인식과 동일하다. 어떤 시인이 말한 것처럼, “저 여기 있단 말입니다!”라고 외쳐도 우주는 침묵한다. 그런 우주에서 인간은 각자 자유의지에 따라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가야 한단다. 발레리가 제프에게 왜 사장을 죽였냐고 물었을 때 그는 “돈을 받기로 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고도 말한다. 이건 제프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삶에 근본적 의미가 없다는 실존주의적 사고가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발레리는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다시 묻는다. 매우 실존적 질문이다. 제프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도 중요하다. 제프는 이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평생 도망 다니며 살아야 할 것이다(잡히면 사형이 거의 분명하다). 그는 그보다 죽음을 선택했다. 실존주의에서 자살은 궁극적인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사무라이’가 많은 모방을 낳았다고 했지만 그건 주로 킬러의 ‘쿨’한 모습이고, 이런 실존주의적 요소는 상대적으로 적다. ‘달콤한 인생’만 해도 주인공의 폭력에는 복수나 응징이라는 상식적 동기가 있다. 미국 영화 ‘존 윅’(2014)이나 ‘드라이브’(2011) 같은 걸 봐도 역시 폭력을 적어도 정서적으로 합리화하려고 노력한다(‘드라이브’는 주인공이 전문 킬러는 아니지만 라이언 고슬링의 매력과 그 ‘쿨’함은 ‘사무라이’의 알랭 들롱과 필적한다). 반면 ‘사무라이’의 제프에게는 그런 심리적으로 타당한 동기가 없다. 그냥 ‘돈’이라는 허무주의적 동기만 있을 뿐이다.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서 실존주의는 1960년대 후반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과 그에 따른 반전 운동, 흑인 인권 운동, 사상적으로는 구조주의 등이 대체했다. 물론 이런 것도 이젠 지난 이야기라고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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