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아동 인권 보고서 ④ 우크라이나] 전쟁 속 아이들 목소리를 담는 사람들

입력 2024-08-29 05:00수정 2024-08-2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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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민간인목소리박물관 대변인 본지 인터뷰
유럽 전역에 난민 600만 명, 88%가 여성과 아이들
전쟁 직접 설명하는 아이들, 심리 치료 효과
증언 기록 외 전문가 상담, 아동 보청기 등 지원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어린이 전문병원 붕괴 현장에서 지난달 8일 한 어린이가 동생을 돌보고 있다. 키이우/AP뉴시스

새벽 2시쯤 집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가족들이 전부 일어났고 뉴스를 봤어요. 아침에 창밖을 보니 폭발들로 인해 하늘이 회색빛이었어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 살던 파블로는 러시아 공습을 받기 전날 친구들과 국제 소년의 날을 즐기고 있었다. 파블로는 그날 밤 엄마가 자신을 앉혀놓고 무언가를 얘기했다고 했다. 친구들과 시간 보내는 데 집중했던 소년은 새벽 굉음을 듣고서야 엄마가 자신에게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게 됐다. 이후 르비우로 대피한 파블로 가족은 현재는 다시 하르키우로 돌아온 상태다. 여전히 러시아의 공세가 집중되고 있지만, 그곳 주민들은 다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드니프로에 사는 여섯 살 베로니카는 지금도 창문이 무섭다고 했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폭격과 화재의 잔재가 공포로 남았기 때문. 어딜 가든 창문이 보이면 몸을 숨기기 바빴다. 베로니카 부모는 “전쟁 후 친구가 사는 곳으로 갔을 때 딸은 부엌에 난 창문을 보고선 ‘우리 집처럼 여기도 불이 날 거 같다’고 말했다. 침실에도 창문이 있자 아이는 겁에 질렸고 결국 쓰러져 잠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최근 본지는 우크라이나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단체 ‘민간인목소리박물관(the Museum of Civilian Voices of the Rinat Akhmetov Foundation)’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아동이 겪는 피해 사례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박물관은 우크라이나 대표 자산가인 리나트 아흐메토프가 세운 동명의 재단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전쟁과 관련해 11만5000회 넘는 증언을 수집해오고 있다.

포키디나 줄리아 박물관 대변인은 본지에 “러시아의 침공은 2014년 시작했으니 전쟁 3년 차가 아니라 11년 차가 맞겠다”며 “불행히도 2022년 2월 24일 시작한 본격적인 전쟁 이후 증언 횟수는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의 침공을 피해 폴란드 남동부 프셰미실로 피란 온 한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임시 수용소로 쓰이는 텐트 밖에 서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프셰미실(폴란드)/로이터연합뉴스
전쟁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아이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일까. 그는 “전쟁이 나고 몇 달 동안 안전한 도시로 이주한 아이들은 그곳에 적응해 더 자신 있고 활동적으로 보였다. 이들은 미래와 삶의 여러 가지에 관해 묻곤 했다”며 “반면 하르키우, 헤르손, 키이우, 드니프로, 자포리자, 수미, 도네츠크와 같은 최전방 인근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다르게 행동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아이들은 불안해하고 자주 아프고 잠을 많이 자고 만성적인 스트레스 징후를 보였다”며 “공습경보와 파괴, 죽음과 같은 지속적인 위험이 아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유럽 전역에 우크라이나 국민 600만 명이 난민으로 살고 있다. 그중 88%가 여성과 어린이다. 특히 어린이들은 정신 건강과 학습, 물, 전기, 난방 등 주요 서비스에 대한 접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상당수가 질병과 분리,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상태다. 또 유엔은 러시아의 거듭되는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인해 올해만 어린이 44명이 숨지고 224명이 다쳤다고 집계했다.

계속되는 전쟁 공포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줄리아 대변인은 “아이들이 하는 인터뷰는 치료 효과가 있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에서 외상 경험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아 감정을 외부화하고 공유하는 것이 있다”며 “증언을 기록한 후 아이들은 슬픔, 고통뿐 아니라 위로와 평화도 느꼈다”고 답했다. 이어 “따라서 우린 심리학자들과 함께 아이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하고,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로 바뀌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증언에 참여했던 11살 크리스티나는 “말하는 동안 다시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힘껏 들여다볼 수 있었다”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줄리아 대변인은 “생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며 “우린 더 나은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부분이 종종 발생하는 만큼 심리학자의 동석은 필수적이라고 짚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목소리박물관의 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 민간인목소리박물관

이처럼 박물관과 재단은 심리학자들을 초빙해 아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0~16세 아이들이 참가하는 이 프로젝트는 크게 △러시아로 추방됐다가 돌아온 아동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동 △위탁가정이나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동 △후견 아동이나 입양 아동 △전투가 활발한 지역에 거주하는 아동 △군사적 행동으로 피해를 본 아동 등 세부적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줄리아 대변인은 “심리학자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루지만, 이제는 상호작용의 긍정적인 측면에 더 집중하고 있다”며 “우리의 우선순위는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회복을 위한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중이다 보니 아이들이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무분별한 범죄에 노출될 위험도 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은 다른 프로그램들도 시행 중이다. 부모를 잃거나 사회화가 필요한 경우 등 가장 취약한 범주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레크리에이션 캠프를 운영하는 것뿐 아니라 전쟁고아들이 새로운 가족을 찾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 밖에도 포격음에 청력을 상실한 아이들에게 청력 보조 기기를 제공하거나 새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여느 가정과 같이 선물을 증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줄리아 대변인은 설명했다.

아동학대에 관한 보도가 매년 쏟아지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로 가정이나 교육시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국한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시선을 넓히면 내전과 쿠데타, 국가 간 전쟁으로 인해 학대를 당하는 전 세계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거나 팔다리를 절단하거나 길가에 방치되는 등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 대부분 이러한 사실을 체감하지 못한다.

한국은 세계 곳곳의 이러한 문제로부터 동떨어진 곳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지정학적 갈등이 국가와 대륙을 가리지 않고 확산하는 상황에서 더는 그저 남일로만 치부할 수는 없게 됐다. 아울러 한국도 규제 사각지대 속에서 가정 폭력으로 고통에 빠진 어린이들이 많다.

이에 본지는 한 주간 전 세계 아동이 겪는 학대와 피해를 집중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군사 쿠데타로 얼룩진 미얀마와 여기에 빈곤, 기후변화까지 맞물린 아프리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전쟁을 겪는 팔레스타인에 거주 중인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아동학대의 실태와 해결 방법을 살펴본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동 학대와 가정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인 아동 학대 의심사례 신고자 보호가 유명무실하게 된 이유를 짚어보고 이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본다.

순서

① 미얀마: 쿠데타 이후 3년 반…길 위로 내몰린 아이들
② 아프리카: 어린이 미래 울리는 학습 빈곤…폭염·빈곤·쿠데타에 심해지는 교육 격차
③ 팔레스타인: 영안실 트라우마에 냉장고도 못 여는 아이들
④ 우크라이나: 전쟁 속 아이들 목소리를 담는 사람들
⑤ 한국: 갈 길 먼 아동 인권…사회는 ‘선진국’, 가정은 ‘후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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