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의 정치원론] ‘선거 지상주의’의 어두운 그림자

입력 2024-04-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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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여야에 권력의 오만함 경고한 총선
민주주의 후퇴·정치불신 되레 심화
시대착오적 ‘선거 올인’행태 극복해야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 지상주의의 폐해를 재확인해 주었다. 선거 결과는 진영에 따라 희비를 극명히 엇갈리게 했으나 선거 과정은 모두를 패자로 전락시켰다. 선거에 모든 걸 걸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 정당과 정치인들로 인해 그 과정은 참담했다. 출마자들의 수치심 없는 처신, 무조건 남 탓이라는 반지성적 행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흑백논리, 정당 조직의 사당(私黨) 전락, 이름조차 부끄러운 위성정당의 재출몰, 유권자를 속이는 야바위꾼 공천과 선거 전략 등. 선거 과정의 각종 추태는 사회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국민의 정치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 후유증은 오래 남아 한국 민주주의를 총체적으로 취약하게 하고 국가 기반을 흔들 것으로 우려를 자아낸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다인 양 지상 가치를 얻은 건 슘페터(Joseph Schumpeter)의 명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1942년 출간된 이후다. 슘페터는 간결성을 중시하는 경제학자답게 민주주의란 “자유 표를 얻기 위한 자유 경쟁(free competition for a free vote)”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하였다. 정당으로 뭉친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는 게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수반되는 여러 당위적 가치와 원칙은 논외로 하고 선거에만 초점을 맞춘 최소 정의이다.

슘페터의 선거 지상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그 간결성과 평이함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고 대중사회(mass society)의 지향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냉전기 자유 진영의 이념이 되어, 자유로운 선거 경쟁이 없는 공산 진영 등 독재체제와의 대결에서 인식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공헌했다. 20세기 후반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확산하는 데도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중사회는 탈대중사회로 이행했다. 냉전 시대도 흘러갔다. 이제 선거 지상주의적 최소 민주주의로는 바뀐 시대적 맥락에 부응하기 힘들게 되었다. 정치인들을 주인공으로 놓고 유권자는 표를 주는 피동적 동원 대상으로 인식하는 모델로는 유권자 개인의 주체성·다양성을 중시하는 세태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다. 형식상 자유로운 선거 경쟁에만 집중해서는 불평등·비포용·공동선 실종의 문제가 방치된다는 비판, 정치인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 정당의 집단주의적 경직성에 빠지게 된다는 비판 등도 공명을 자아내게 되었다.

또한 선거에만 우선순위를 두니 선거 후 국정운영은 뒷전에 밀리고 선거 후유증으로 타격을 받거나 역으로 독선적 권위주의로 변질된다는 비판도 힘을 얻게 되었다.

선거 중심적 슘페터 모델에 대한 각종 비판은 다양한 갈래의 민주주의 모델들을 모색하는 학문적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민권 등 절차적 측면을 더 풍부히 고려하자는 갈래, 평등·공정성·포용·정의 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내용적 민주주의를 기하자는 갈래, 참여·숙의·시민교육 등 공동체주의적 요소를 충실히 가미하자는 갈래, 다수주의 원칙을 합의주의 정신으로 보완하자는 갈래, 이익집성 개념과 이익통합 개념의 조화를 이루자는 갈래, 중립적 관료와 선거직 정치인 간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자는 갈래 등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학문뿐 아니라 구미 여러 나라의 실제 영역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실천되고 있다.

이번 선거 결과는 여야 모두에게 권력의 오만함을 경고해 주었고, 반면 선거 과정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선거 지상주의는 이제 시대착오다. 선거에 다 걸고 그로 인한 국정 폐해는 나 몰라라 하는 정치권의 행태가 더 이상 계속되어선 한국 민주주의와 국정 거버넌스의 미래에 너무 큰 해가 초래된다.

이제 슘페터 식의 선거 지상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제시되고 있는 일련의 학문적 이론을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문적으로는 진작 시효가 지난 슘페터를 현실 정치에서 언제까지 받들어 모시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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