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저앉으려던 순간 뒤쪽에서 반가운 발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남자분이다.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치려다 뒤를 보며 웃음을 띤 채 한마디 던진다.
“등산은 초보신가 봐요. 힘드시죠. 그래도 30분만 더 오르면 정상이니 힘내세요.” 그리고 내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보폭까지 줄여가며 내 속도에 맞춰주신다. 느린 발걸음으로 둘이 두런두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힘든 줄도,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다 왔네요. 저기가 정상입니다.” “벌써요?” 아쉽다는 내 대답에 빙긋이 웃던 그분은 샛길로 빠지며 손을 흔든다. 더 높은 산까지 오를 모양이다. 정상에서 맞는 시원한 바람은 그간의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2차 병원의사인 내가 주로 만나는 환자분들도 이처럼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초보 등산객과 비슷하다. 반복되는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당뇨병 환자, 약을 써도 좀처럼 호전을 보이지 않는 만성 폐질환 환자, 그리고 기약 없이 간이식을 기다리며 합병증으로 고통받는 간경화 환자.
완치라는 정상을 향해 계단을 한 걸음씩 밟아 가지만 그 앞엔 또 다른 가파른 계단이 버티고 있고, 반복되는 재발과 기약 없는 치료에 ‘정상이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영영 정상에 오르지 못할지도 몰라’라며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분들.
그런 환자분들을 위해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많은 시간 고민해 보지만 답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등산을 통해 풀어갈 방법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힘든 이들을 위해 내 곁을 조금 더 내어주는 것, 바쁘게 걷던 내 속도와 보폭을 줄이고 환자들과 같이 발을 맞추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도달할 정상이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이것이 힘든 발걸음을 내딛는 이들을 위해 최적의 치료와 더불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밤을 꼬박 새운 천식 환자 한 분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가만히 그의 손을 잡고 청진기를 가슴에 댄다. 그리고 청진기를 통해 전해오는 그의 아픔을 느낀다.
“어젯밤 많이 힘드셨죠? 곧 좋아지게 해 드릴게요. 조금만 버티고 힘내세요.”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