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세이] 법안에 사람 이름이 꼭 필요한가

입력 2023-09-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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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410회국회(정기회) 제4차 본회의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많은 의원석이 비어 있다. (뉴시스)

입법의 기술 중 하나는 ‘네이밍’이다. 유명한 사건이나 인물명을 법안의 약칭으로 사용하면 법안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다. 그 결과로 지지 여론이 생기면 입법에도 속도가 붙는다.

하지만, 법안의 약칭으로 사용되는 이름만으론 법안의 내용을 유추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직장 내 괴롭힘 금지조항까지 확대하는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은 영화 ‘다음 소희’에서 이름을 따 ‘다음 소희 방지법’으로 불리지만, 정작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법안의 약칭만 보고 내용을 알기 어렵다.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인 ‘태완이법’도 1999년 발생한 ‘태완이 사건’을 모른다면 이해가 어렵다.

이런 법은 숱하게 많다. 산업현장 안전규제를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김용균법’으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내 과속단속카메라 등 설치를 의무화하고 스쿨존 교통사고 가해자를 가중처벌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통칭 ‘민식이법’으로 불린다.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법안 중에는 자녀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민법’ 개정안, 일명 ‘구하라법’이 있다.

사건명, 인물명을 앞세운 법안의 가장 큰 문제는 본질 희석이다. 법안의 약칭으로 쓰이는 사건, 인물을 모르는 사람들은 법안의 내용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법안이 약칭으로 불리는 기간이 길어지면, 사람들의 기억엔 법안의 내용이 아닌 약칭만 남는다. 때로는 법안 내용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나 고민 없이 법안 자체가 희화화 대상으로 전락한다.

당사자 의사에 반해 법안이 인물명으로 불리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게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과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이다. 두 법안은 김영란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고안해 ‘김영란법’으로 불리지만, 법안 내용은 김 교수가 고안한 초안과 다르다. 초기에는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을 뺀 ‘청탁금지법’만 단독 입법됐고, 그조차 소관 상임위원회(정무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대폭 수정됐다. 이에 김 교수는 법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법안에 굳이 약칭을 써야 한다면, 그 약칭에 핵심이 담겨야 한다. 누구든 약칭을 보고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시간이 흘러도 본질이 희석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람직한 약칭 사례 중 하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법안의 약칭은 명료해야 한다. 그래야 알려지고,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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