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험대 올라선 사형제도 [정책 발언대]

입력 2023-08-01 05:00수정 2023-08-0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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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현 보좌관(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실). (시대전환 제공)

“나는 불행한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라는 단편적 생각. 이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향해 ‘칼부림’으로 표출됐다. 단 6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한 20대 청년의 삶은 영겁의 시간으로 내몰렸고, 신림동 젊음의 거리는 죽음과 공포의 길로 뒤엉켰다.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이 남긴 단상이다.

첫 범행 6분 만에 체포됐다. 6분이 아니라 60분이었다면 어땠을까. 비현실적 가정법이지만, 그 가정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은 우리를 트라우마의 늪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건 이 가정법이 단지 허구적 상상이 아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흉악범죄는 끊임없이 상상의 세계를 찢고 나와 현실이 되어왔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정치는 거대담론을 꺼내든다. 사회구조가 문제라고 진단한다. 더러는 성장과정에서 가정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을 되짚자는 결론을 내린다. 범죄의 특성을 고려한 다각적 차원의 사회적 예방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말은 단골손님이다. 그러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며 자아비판 의식을 치르고, 잊지 말고 기억하자며 도덕적 댄디즘을 입는다.

얼핏 옳은 얘기지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거칠게 항변하면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모두가 잠정적 흉악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 자아비판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다각적 차원의 사회적 예방 장치 마련하자는 얘기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나왔다. 어쩌면 매번 반복되는 거대담론적 제안은 희석된 책임의식의 발현일지 모른다.

유가족은 호소한다. “사형을 선고해 달라”

하지만 국제사회는 사형제 폐지로 가고 있다. 큰 틀에선 바람직한 일이다. 생명존중은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최상의 행위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흉악범죄가 터질 때마다 ‘사형제’를 꺼내들까.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은 “그저 복수심이 아닌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우리사회에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만큼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가 한해 10~40명씩 가석방되고 있다. 게다가 매년 300~400건의 보복범죄 발생은 사형제가 단순히 야만적 복수가 아니라 정의실현을 위한 제도가 아닐까 질문하게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형은 범죄자 스스로 저지른 살인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 말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에 있어 사형제는 범죄 억제를 위한 수단도 아닐뿐더러, 사회적 비용이라는 효율성의 문제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직 정의실현의 문제, 그것이 사형제의 본질이다.

간단치 않다. 사형제가 인류역사에서 정적 제거용이나 공포정치의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는 점을 잘 안다. 그렇다고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을 동일선상에서 봐야할까. 무책임한 결론이다. ‘직접적 살인’으로 짓밟힌 생명에 대한 책임, 그 유가족들에 행해진 ‘간접적 살인’에 대한 책임, 우리사회의 평범한 사람에 가해진 ‘광의적 살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지난 26일 국회 법사위에서 조정훈 의원과 한동훈 장관의 토론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떠올리게 했다. 사형제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든 피해자 중심주의가 우선되어야 하며, 극악무도한 사회악은 영구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력한 형벌이 총체적 정의를 실현한다는 건 너무 거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매번 거대담론에 숨어버리는 ‘흉악범죄’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결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땅에 남겨진 자들의 가슴에 주어진 책임이며, 저 하늘에서 우리사회를 밝게 비추는 정의의 빛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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