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 휴전선으로 파주 일대의 관공서가 인근으로 내려오면서, 지역주민의 일상과 지역 발전을 통근 열차와 함께 해왔다.
금촌역에서 순달교 방향 도로 양쪽에는 크게 번성했던 역답게 선술집과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공릉천 칠간 다리에서 기차 화통이 울어대면, 손님맞이를 준비하던 가게들. 그러나 지역 특성상 수해 피해가 잦아 이를 대비하기 위해 2008년 현대식 디자인의 대형 고가 역사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오늘날 금촌 일대가 파주의 행정, 상업,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금촌역과 한국전쟁의 역할이 컸다. 금촌 일대는 일제강점기 초까지 아동면으로 쇠재(金陵), 새꽃(新花), 새말(金村), 풀무골(冶洞), 검산(檢山), 맥금(陌金) 등 6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경의선이 들어서기 전에는 대부분 논이었던 시골 마을. 금촌의 지명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재미있는 유래가 많다. 일본인이 역 이름을 짓기 위해 마을 이름을 묻자 ‘새말’이라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일본인이 ‘쇠말’로 알아들어 금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금촌역이 들어서면서 금촌 일대가 교하지역의 중심지로 성장, 금촌장이 들어섰으며 지역의 이름도 역명을 따라 금촌으로 바뀌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금촌에 피란민 임시수용소가 세워져 도시가 급속도로 팽창하였으며 휴전선이 생기면서 기존 포구를 기반으로 했던 봉일천장과 문산장이 쇠퇴하고 철길을 끼고 있던 금촌장이 경기 서북부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선 설치로 문산역이 경의선의 종착역이 되면서 접경지역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주요 관공서들이 금촌역 인근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런 점이 금촌역이 파주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하게 된 배경이다. 또한, 1990년대만 해도 한여름 장마로 문산일대가 물에 잠기는 불편을 겪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자료=국가철도공단 ‘한국의 철도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