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결권이 도입 논의 약 3년 만에 국회 문턱을 넘었지만 본회의 통과 마지막까지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창업가의 기업가 정신과 혁신을 키워 벤처 성장을 활성화 해야한다는 논리와 재벌 세습 악용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비상장 벤처기업·스타트업에 복수의결권을 부여하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 개정안이 전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복수의결권은 비상장 벤처·스타트업 창업주에게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가진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차등의결권으로도 불린다. 이번 개정안은 비상장 벤처기업을 창업한 경영자의 지분율이 30% 미만이 되면 주주들의 동의를 받아 정관을 변경해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존속 기간은 최대 10년이다.
전날 본회의에선 벤처기업법 투표를 앞에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8명의 여야 의원들이 토론자로 나서 50분 가까이 찬반 주장을 이어갔다. 여야 의원들이 제도 도입에 대한 공감대를 이뤄 3년 가까이 계류돼 있던 개정안이 27일 법사위를 통과했지만 본회의 마지막까지도 부정적인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첫 토론자로 나선 더불어민주당 오기형 의원은 복수의결권 도입에 강하게 반대했다. 오 의원은 "똑같이 1만 원을 투자했는데 창업주는 10개의 의결권을 갖고 외부 투자자들은 1개의 의결권을 가지면 그게 투자유치에 도움이 되는가"라며 "실제 그런 논의가 있었지만 논의 근거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왜 시행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지적했다. 또 "탈법적으로 기업을 승계받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면 17세기 봉건사회로 가는 것"이라며 "복수의결권은 부의 편법적 세습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습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게 오 의원의 주장이다. 복수의결권이 대기업으로 확대 시행될 가능성을 우려한 셈이다.
복수의결권 찬성론자로 나선 국민의힘 최형두 의원은 "유니콘 기업 4개국인 미국, 중국, 인도, 영국 같은 국가들은 이미 복수의결권 주식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며 "다른 나라는 혁신가를 키우고 혁신가를 위해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안되나"라고 반문했다. 최 의원은 쿠팡을 예로 거론했다. 앞서 쿠팡은 2021년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당시 쿠팡 의장의 지분은 10.2%였지만 보유 주식 1주당 의결권 29개를 부여받았다. 최 의원은 "쿠팡은 상장 이후에도 적대적 M&A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 의원은 견제장치가 존재해 편법적 세습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복수의결권 보유 자격을 비상장 벤처기업 등기사인 창업자로 한정하고 있고, 투자 유치로 최대 지주 지위를 상실하는 경우에만 주식을 발행하도록 했다. 발행 단계에서 발행주식 총수의 75% 이상의 동의를 받도록 해 기존 주주의 동의 없이는 발행할 수 없다. 상속, 양도, 증여시에는 즉시 보통주로 전환돼 편법 상속도 차단돼 있다"고 못박았다.
이어진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은 제도 도입 반대에 힘을 실었다. 이 의원은 "우리나라 상법은 소액주주와 주주에 대한 보호장치가 취약하다"며 "복수의결권을 가진 창업주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자본 거래를 했을 때 다른 주주에 손실을 끼치면 이를 교정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고 설명했다. 제도가 도입된 주요국들의 경우 주주 권리를 침해했을 때 교정하는 소송 제도 등 여러 장치가 있다는 게 이 의원의 주장이다. 그는 이런 장치가 병행될 경우 복수의결권 도입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정의당 류호정 원내대변인도 반대에 무게추를 실었다. 류 대변인은 "본 법안이 통과하면 1주당 최대 10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며 "국민투표 시에 10표를 행사할 수 있는 시민권을 국가가 발행할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특히 창업주가 10배의 의결권을 갖는 것이 공정하지 않고, 현행법상 제도와 충돌한다는 점을 지목했다. 그는 "한 예로 주식매수청구권이 있다. 기업이 인수합병시에 발생하는 대주주와 개미투자자의 불공정을 시정하기 위해 주주에게 부여한 권리다. 만약 경영자에 차등의결권을 부여하면 개미들의 청구권은 무력화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벤처가 거대 신생기업이 되기 위해선 오히려 대기업의 기술탈취 같은 고질적인 문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찬성론자로 나선 국민의힘 한무경 의원은 "기술과 열정만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젊은 창업자의 의결권은 줄고, 자본을 가진 투자자의 입지는 점차 넒어지고 있다"며 "자본은 적어도 기업을 성장시킨 창업자에게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복수의결권 도입으로 인한 여러 우려 지점들은 개정안으로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는 게 한 의원의 생각이다. 그는 "개정안은 상법이 아닌 벤처기업법에 도입돼 비상장벤처 기업에 한정돼 운영된다"며 "벤처기업이 대기업집단에 포함되는 즉시 벤처기업의 지위를 잃어 벤처기업의 특례 활용이 불가능하다" 반박했다.
그간 복수의결권 도입을 주장해온 더불어민주당 김경만 의원은 이날도 침체된 벤처투자 시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첫 스텝이 복수의결권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올해 1분기 벤처 투자액과 펀드 결성액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60.3%, 78.6% 폭락했다"며 "얼어붙은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회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벤처기업이 대규모 투자 유치로 인한 지분 희석 우려를 해소해 안정적인 혁신 활동을 보장하고,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비할 수 있게 한다"고 강조했다.
50분 가까운 토론 끝에 이어진 투표에서 벤처기업법은 260명이 표결에 참여, 찬성 173인, 반대 44인, 기권 43인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각에선 복수의결권이 우여곡절 끝에 도입됐지만 부정론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도입 이후에도 실효성 논란이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본회의를 통과한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되고, 6개월 후인 10월께 본격 시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