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통신] 또 터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입력 2023-04-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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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완섭 재미언론인

지난달 말 의회 청문회. 미 금융통화 정책의 최고위급 경찰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클 바 연방준비제도(연준) 은행감독 담당 부의장은 의회에 제출한 서면 증언에서 “실리콘밸리은행(SVB) 붕괴는 관리 부실의 교과서적인 실패 사례”라고 진단했다. 경영진의 실패도 원인이지만 감독당국이 무책임했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연준이 긴급 대출과 보장 한도를 넘어선 예금보호 조치로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은행 감독과 예금보호 관련 시스템을 전면 뜯어고치겠다고 다짐했다.

바 부의장은 예금주와 의원들의 분노와 질책을 의식해서인지 자세를 한껏 낮추면서도 ‘전혀 손 놓고 있진 않았다’며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연준 감독관이 2021년과 지난해에도 문제를 발견해 경고 조치했으며, 올해 2월에도 이사회 관계자에게 금리인상의 위험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준이 지난해 SVB에 유동성과 관련해 되레 좋은 평가를 했었다는 점은 애써 언급하지 않았다. 마틴 그루언버그 연방예금보험공사 회장은 SVB와 시그니처은행 경영진의 과실 조사에 착수했으며 보장 한도를 넘는 예금까지 전액 보호해주기로 한 것은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거듭 강조했다. 감독자로서 할 만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의원들은 “문제를 알고도 방치한 것 아니냐” “감독당국이 졸음운전을 한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결과적으로 감독당국은 은행 경영진에, 의원들은 감독 당국에 책임을 추궁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의회 청문회는 마치 2008년 금융위기 데자뷔를 보는 듯했다. 당시 위기가 한탕주의에 빠진 은행과 무책임한 감독당국의 합작품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은행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위험한 파생상품을 마구 팔았고, 감독당국은 규제를 한껏 풀어 돈이 몰리도록 부추겼다.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이 극단으로 치달았고, 욕망이 욕망을 낳았다. 거품 위에 올라앉은 소비자들은 부풀려진 자산으로 흥청망청 호황을 구가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던 폭탄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현실화됐고, 전 세계가 순식간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금융회사들의 방만한 경영과 투자자들의 탐욕, 감독당국의 허술한 규제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실리콘밸리가 혁신과 기술의 미래를 찬양하는 동안 SVB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경영진은 변화와 다가올 위험을 무시한 채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파산 직전 샌프란시스코 고급 팔레스호텔 콘퍼런스에서 투자자와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 기술진을 향해 빛나는 미래를 얘기하고 있던 그레고리 베커 SVB CEO. 그는 일주일 전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은행의 재정 건전성이 위험에 처해 있고, 채권이 정크 등급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알려준 경고는 애써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그가 강연한 다음 날 은행은 18억 달러의 손실과 210억 달러의 부채를 매각해야만 했다. 놀란 예금주들은 순식간에 400억 달러를 인출했고, 주가가 60%나 폭락했다. 최고 경영진이 먼 산을 바라보며 야망과 미래를 말하면서 당면한 위험관리와 기본을 소홀히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SVB 사례가 또 한 번 말해주고 있다.

1983년 신생 기술기업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커뮤니티은행으로 출범, 3260억 달러의 예금고를 자랑하는 거대은행으로 성장한 SVB 40년 신화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SVB를 ‘혁신 경제의 심장이자 영혼’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레고리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실패는 개인의 파국으로 끝나지 않았다.

퍼스트시티즌스 은행이 SVB를 긴급 인수하긴 했지만 스타트업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투자처를 물색 중이던 벤처캐피털들은 ‘아 뜨거워라’ 하면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해 말부터 벤처 투자가 전년도에 비해 61%나 줄어든 터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창업자의 22%는 아예 올해 자금 조달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SVB 경영진은 보유자산의 포트폴리오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으며 위험회피라는 은행경영의 기본을 무시한 채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달린 게 화근이었다. 게다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가파른 금리인상이라는 거대한 파도, 즉 경영환경 변화를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급한 불은 꺼졌지만 여진은 계속 남아 있다.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주가는 80% 이상 폭락했고, 퍼시픽웨스턴 은행 등의 가치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금융 자본가와 경영자들의 과욕과 감독당국의 방만함이 뒤섞인 욕망의 용암이 들끓고 있는 한 제3, 제4의 화산이 언제 또 터질지 모른다.

wanseob.k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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