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부의 대물림, 기업의 영속성

입력 2023-03-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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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을 이어온 장인의 혼(魂)은 경탄을 자아낸다. 일본에 많고, 독일도 마찬가지다. 녹슨 거푸집, 주저앉은 화로, 낡은 공구들은 친근한 클리셰다. 모두 멋지다며 부러워한다. 그럼 우리 기업은? 모르겠고, 일단 부의 대물림은 나쁘다는 습관적 비판이 따라붙는다.

중견기업은 두 개의 키워드로 설명된다. 최고의 기술력과 전통이다. 앞선 칼럼에서 기술력에 관해서는 많이 말했다. 세계 일등이 수두룩하다는 정도면 족할 터다. 중견기업 대부분은 수십 년의 업력을 유지해 왔다. 평균 20년, 제조업은 30년을 넘어선다. 서양의 장수기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 산업의 발전사를 돌이켜보면 그 무게감이 절대 낮지 않다.

1세대 중견기업인들은 창업에서 오늘날까지 눈부신 성장을 이끌었지만, 인구절벽, 고령화, 노동력 부족 등 구조적인 문제로 가까운 장래에 산업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될 수 있다는 전망은 백발의 노장들을 조급하게 만든다. 기업의 영속적인 발전을 뒷받침할 예측 가능한 경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으는 이유다. 핵심은 원활한 기업승계, 이를 뒷받침할 제도들이다.

기업승계(企業承繼·Businesses Succession)는 기업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소유권과 경영권을 이전하는 과정이다. 성공적인 기업승계는 기술과 노하우의 계승·발전, 일자리 창출·유지는 물론 영속기업(Going-Concern)으로의 성장과 장수기업의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경제 전반의 활력과 국가 경쟁력을 제고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우리나라의 상속세 및 증여세 최고세율은 OECD에서 가장 높다. 20%의 할증평가를 포함한 실효세율은 무려 60%에 달한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처분하면 경영권조차 확보할 수 없어 기업을 매각해야 할 판이다. 후계자를 찾지 못한 우량기업이 외국계 사모펀드에 매각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부의 대물림’이라는 왜곡된 시각이다. ‘책임과 기업가정신의 전수’로서 기업승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한다는 담론과 주장이 넘쳐나지만,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논의는 정치적 이해타산에 가려 빛을 잃기 일쑤다.

지난해 국회의 격론을 거쳐 가업상속공제 대상(매출 4000억 원→5000억 원 미만)과 한도(최대 500억 원→600억 원)가 확대됐다. 사후관리기간(7년→5년)과 고용유지 조건도 완화했다. 상속·증여 재산 평가 시 최대 주주 주식 할증평가(20%) 제외 대상을 매출 5천억 원 미만 중견기업까지 확대하고,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대상과 한도도 상속공제와 동일하게 조정했다. 충분치 않지만 반가운 소식이나, 격렬했던 여야의 갈등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많은 선진국이 상속세를 완화하거나 폐지하고 있다. 우리만 거꾸로 갈 이유는 없다. 상속세 최고세율을 OECD 평균 수준인 15%로 낮추고, 중·장기적으로는 상속세 폐지도 과감히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상속이 아닌 처분 시점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자본이득세 도입은 필수다. 공익재단법인이나 신탁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승계방안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

중견련은 2017년부터 중견기업 후계자 모임인 Young CEO Network를 운영해 왔다. 대부분 30, 40대, 여성 비율이 높고, 글로벌 경험이 많다. IT, 바이오, 문화 콘텐츠, 식음료 등 새로운 사업과 투자에 관심이 매우 크다. 철강 회사의 후계자가 성공적인 주류 브랜드를 론칭한 경우도 있다. 제조업 중심 산업구조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성공해야 하는 2세 중견기업인의 고민의 깊이가 이미 성공한 선대의 고민과 결코 다를 바 없다.

선입견을 버리라는 말은 흔한 일상어다. 고집을 넘어 이내 너와 나의 이분법으로 진화하는 우리 사회의 확증편향은 토론을 왜곡하고 발전을 가로막는다. 해법은 판단중지, 에포케(Epoche)다. 1차 세계대전의 전조가 내리깔린 20세기 초반, 에드문트 후설은 황폐한 유럽의 정신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으로 기존의 관점을 일체 버리고 사태 자체로 돌아가라고 역설했다. 백 년 전이다. 부의 세습은 없다. 발전된 경제의 지속 가능함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절실하다. 우리 기업은 특혜를 원하지 않는다. 가장 잘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더 신나게, 더 오래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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