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옴부즈]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판결의 여운

입력 2023-02-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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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승 전 대한법무사협회장·법학박사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지난해 12월 서울행정법원이 ‘장애인일자리사업 불합격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에서 중증 청각장애인인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면서 부가로 설명하고 있는 판결주문이다. 우선 놀라우면서도 신선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판결 이유에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을 두어, “다소 아쉬운 점도 없진 않겠으나, 처음으로 하는 시도이니만큼 너그럽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말로 당사자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후 “이 사건에서 재판부가 고민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설명에서다.

물론 이 사건에서 수화로만 소통이 가능한 원고가 판결문을 쉬운 용어로 써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손 쳐도 이런 판결문의 시도는 줄곧 재판의 권위를 의심하던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형식의 판결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재판과정에서 같은 인간으로서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배어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권위주의 중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인 대표적인 것이 법률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법 문구를 해석해 내야 하는 성문법 체계에서 법률가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왔다. 여기에 법률권위주의가 한몫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법률권위주의 문화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 결과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폐습이 초래되었다. 이런 이유로 시민사회를 위하여 존재해야 할 법이 가진 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법률가로의 진입장벽은 여전히 높다. 치열한 경쟁과는 달리 법률서비스의 문턱은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로스쿨 제도 도입 당시만 해도 법률시장에서도 시장경제 논리가 그대로 들어맞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기득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법률가의 공급 확대에도 크게 기여치 못한 채 꾸준한 수적 팽창이 직역의 존재만 견고히 해주는 장치로 작동되는 감이 있다.

재판에서 그동안 판결문은 우선 문장이 길었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및 수식어가 분명치 않아 법률전문가조차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장문이 주는 겉멋이 판결문에서 꽃을 피웠다. 정작 읽는 이는 꼬불꼬불한 미로를 헤쳐나가느라 숨넘어갈 지경인데도 말이다. 또 하나 일본식 한자투성이였다. 일본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입법의 역사에서 오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를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함에 따라 긴 문장이 주는 모호함과 더불어 판결문은 일반인이 감히 넘보기 어려운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렇듯 애매하고 어려운 문장과 법 용어가 권위로 잘못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 간의 관계개념인 권위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권위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수용 가능할 때 비로소 생겨나는 법이다. 판결문이 법률소비자인 시민의 눈높이에 철저히 맞춰져야 하는 까닭이다. 시민과 동떨어진 법 운용은 실효성이 없으며 성숙한 법치사회 진입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시민 중심의 법 운용이야말로 주권자가 준 권한을 행사하는 사법 관여자의 책무다.

이번 행정법원의 판결문은 재판관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인간적 통찰력과 원칙에 엄격하되 말 없는 부드러움을 요구하는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의 법관상이 겹쳐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주권자 국민에 대한 존중감이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인간의 존엄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지 머리로 외워서는 실체에 이르기 어렵다. 주권자 국민이 맡긴 사법권은 군림권이 아닌 파수꾼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판결에 대하여 원고가 항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소는 상급법원에 구제를 구하는 당사자의 권리인 만큼 판결에 내포된 가치와는 별개 문제다. 이 판결문의 모습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반드시 이대로 따르라는 것도 아니다. 재판의 본뜻을 곱씹어보면서 지난 재판행적을 되돌아보고 친시민적 법정을 기약하고자 함이다. 판결이 남긴 가치를 다른 법정과 공판정으로 전파하여 사법신뢰 회복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내친김에 이런 판결로까지 치달아 본다.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부족하다면 상급법원의 판단을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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