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중견기업과 함께
매일유업 평택공장은 매년 두 번 멈춘다. 선천성 희귀질환으로 일반분유를 못 먹는 어린이용 특수분유를 만들기 위해서다. 단 10분, 특수분유 1000개를 위해 하루 4만 캔의 일반분유를 생산하는 공장은 열흘간 공정을 중단한다. 고(故) 김복용 회장은 “한 명의 아이도 건강한 삶에서 소외돼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매일유업은 1999년부터 20년 넘게 특수 분유를 생산하는 국내 유일 중견기업이다.
지난해 여름 누리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우리나라는 일곱 번째로 우주 강국 대열에 올라섰다. 누리호 프로젝트는 13년간 약 2조 원이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다. 대선이엔씨, 비츠로넥스텍, 에스앤케이항공, 한양이엔지, 한국카본, 한국항공우주산업, 한국화이바 등 항공우주 분야 우수 중견기업이 개발에 참여했다.
중견기업은 중소기업 범위를 벗어나고,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지 않는 기업이다. 3년 평균 매출액이 업종별 기준 400억~1500억 원 이상이거나, 자산총액 5000억 원을 넘어선다. 중소에서 대기업에 이르는 성장 경로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는, 말 그대로 가운데 ‘중(中)’, 굳을 ‘견(堅)’, 경제의 허리를 떠받치는 중심축이다.
2021년 기준 중견기업은 전체 기업의 1.4%(5480개)에 그치지만, 전체 매출의 15.4%(853조 원), 수출의 17.7%(1138억 달러), 고용의 13.1%(160만 명)를 담당하고 있다. 2020년 중견기업 연구개발(R&D) 규모는 민간 전체의 14.1%(10조4000억 원)를 차지했다. 중견기업 전체 매출의 50.3% 이상이 중견기업의 36.3%(1989개)인 제조 중견기업에서 나오며, 핵심은 소재·부품·장비 중견기업(제조 중견기업의 84.6%·1683개)이다. 소부장 으뜸기업 43개 중 53.5%, 23개가 중견기업이다. 일본 수출규제, 미중 무역분쟁 등 경제 위기마다 소부장 중견기업은 핵심기술 국산화를 통해 산업발전의 기본 요건인 공급망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대내외 충격을 흡수하는 안전판으로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이 많을수록 경제 리스크는 자연히 감소한다.
2010년 ‘세계적 전문기업 육성전략’으로 시작된 중견기업 정책 발전사는 중견기업의 가치에 대한 정부의 인식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2012년 전담 정부조직이 최초로 설치되고(산업통상자원부 중견기업정책관), 2014년에는 중견기업 육성정책의 법적 기반인 중견기업 특별법이 제정됐다. 1992년 발족한 한국경제인동우회를 모태로, 중견기업을 대변하는 유일한 법정단체인 한국중견기업연합회도 같은 해 7월 출범했다. 이후 10여 년간 추진된 다양한 정책들은 중견기업 육성 제도 기반 구축, 중견기업으로의 성장에 따른 부담 완화에 초점을 맞췄고, 올해 1월 16일에는 ‘월드베스트 중견기업이 선도하는 튼튼한 산업생태계 구축’을 비전으로 세운 3대 전략, 10대 과제의 ‘새정부 중견기업 성장촉진 전략’이 발표됐다.
지난해 8월, 30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중견련 상근부회장으로 취임했다. 평생 공무원으로서 국가 산업과 기업 발전을 위해 일해왔는데도, 민간에서 새로 출발하게 되니 부담이 적지 않았다. 돌파구는 이번에도 현장에 있었다. 중견기업 회장들을 만나고 경영에 대한 통찰과 인생의 지혜를 배웠다. 대통령이 최초로 참석한 중견기업인의 날 기념식, 중견기업 혁신성장 정책 포럼, 중견기업 CEO 오찬강연회, 중견-스타트업 상생라운지, 중견기업 디지털 전환 포럼 등에 잇달아 참석해 현장의 문제의식을 직접 확인하면서 합당한 역할과 개인적인 비전을 구체화하고 있다. 부임 초의 막연했던 책임감이 기대와 설렘, 그리고 목표가 뚜렷한 열정으로 바뀌어가는 까닭이라고 믿는다. 우리 산업과 경제의 중심축인 중견기업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인생 2막의 첫 장을 힘차게 펼쳐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