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지금 여기 (now & here)

입력 2022-11-0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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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연세대학교 명지병원 외래교수

‘사고 실험’을 해보자. 나는 멍멍이와 북한산을 산책하는 중이다.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멧돼지가 출몰하는 게 아닌가. 둘 다 공포에 질려서 전속력으로 도망갔고,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다행히 다친 곳도 없다 하자. 집에 도착한 뒤, 멍멍이는 피곤한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단잠에 빠진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머릿속은 매우 분주하다.

‘그곳에 야생맹수가 나타나는지 미리 검색을 해보아야 했는데, 만약 심하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다면….’

‘앞으로는 우리 동네에도 출몰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멍멍이도 당시에는 나 못지않게 공포에 질렸었고, 당분간 그 산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많은 시간을 그 사건에 몰두하느라 에너지를 쏟지는 않는다. 일단 지금 이 집은 안전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인지하고 있으므로.

“학창시절 공부를 열심히 안 한 게 내 인생의 발목을 계속 잡고 있어요.”

“경기는 최악이고, 아이들은 아직 어린데, 앞일만 생각하면, 눈이 아찔해요.”

진료실에 찾아오는 분들의 고민과 관심은 거의 다 과거와 미래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에 초점을 맞추면 ‘우울’이 찾아오고, 미래에 시선을 돌리면 ‘불안’이 찾아온다. 그래서, 인간은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나는 이 경구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 지구에 78억 인구가 살지만, 길어도 150년 안에 다 생을 마감할 것이다. 즉, 누구도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인 것이다. 각자의 여명이 몇 년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서 나에게 하루란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살아 있고, 이 장소에 사과 묘목이 같이 뒹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순간을 위해서라도 심고 물을 주는 것이 어떠할까?

다시 ‘사고 실험’으로 돌아가자. 지금 나는 집에 있고, 문은 안전하게 잠겨 있다. 집안의 공기는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아주 아늑하다. 창밖의 풍경은 평화롭고, 내 근육과 장기는 기분 좋은 피로감을 전해 주고 있다. 멍멍이를 껴안고, 소파에 같이 누우니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며, 잠이 스르르 밀려온다. ‘지금 여기’는 안전하고 평화롭다. 그게 다다.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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