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애플뮤직을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애플이 음악 산업을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점으로 시작한 아마존이 온라인 유통 공룡으로 변신했을 때는 소매업자들을 죽일 것이라고 했고요. 에어비앤비가 번창할 때 사람들은 숙박 산업이 다 망할 듯이 걱정했고, 우버가 등장했을 때는 택시 산업이 당장 무너질 것처럼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온·오프라인에서 음반을 사고, 마트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호텔이나 민박, 콘도, 펜션을 이용합니다. 또 목적지에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립니다. 기술이 아무리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도 전통 산업을 다 죽이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은행업으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기술과 금융업의 융합 ‘핀테크’의 등장 이후 전통 은행의 입지가 빠르게 좁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탈중앙화 금융(DeFi, 디파이)이라는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수 세기에 걸친 은행 주도의 신용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은행의 전유물이 기술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돈을 맡아주거나 빌려주는 ‘은행’의 역사는 30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 문명의 발원지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현재 이라크 등)에 있던 고대 왕조 바빌로니아에서는 성전에서 사람들의 재산과 귀중품을 보관해주거나 곡물 및 가축을 빌려줬는데, 이것이 은행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는 곡물이 돈의 기능을 하였고, 곡물 창고가 은행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 곡물 창고는 곡물 보관뿐 아니라, 현재의 송금 업무도 담당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대금을 지불할 때, 돈을 이동시키지 않고 결제했답니다. 고대 이집트 각지의 곡물 창고의 보관 상황은 지중해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중앙 창고에서 집계해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은 곡물을 이동시키지 않고 곡물을 거래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에도 환전 업무가 있었습니다. 환전은 국가와 지역마다 다른 통화를 교환해 수수료를 얻는 사업입니다. 당시에는 지역마다 다양한 통화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지역 간 비즈니스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환전상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현재의 은행 ‘뱅크(BANK)’는 12세기 무렵, 상업의 사관이었던 북이탈리아의 환전상이 사용하던 ‘장부(BANCO)’가 어원이라고 합니다.
이후 근대 은행의 시초가 된 건 190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행이었습니다. 당시 상업 혁명으로 다른 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해졌고, 그로 인해 다양한 통화가 유입되자 은행은 암스테르담 시의 지원을 받아 화폐를 발행하고 통제하는 중앙은행의 시초가 됐습니다. 아울러 돈을 맡기고 대출해줘 이용자를 지원하는 인프라를 만들어왔습니다.
은행은 그렇게 신용을 만들었지만, 점포와 사람 등 신용 유지 비용이 불어나 이용자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2020년 미국 은행업계 관련 비용은 약 5000억 달러(약 602조 원)로 총수익의 약 60%에 이릅니다.
이렇다 보니 은행들 입장에선 인력을 기술력으로 대체하려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DeFi에 사용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전통 은행의 비용 구조를 파괴합니다. 은행을 통하면 입금에 며칠, 수수료로 10% 이상 드는 해외 송금이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다국적 회계컨설팅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블록체인 보급에 의해 2030년까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 이상인 1조7463억 달러가 늘어나는 효과가 생깁니다. 그 가운데 금융 서비스 혁신은 4분의 1에 이릅니다.
“은행업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필요하지 않다(We need banking, but not banks.)” 30년 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진 것일까요? 미국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에서는 은행보다 기술 기업을 신용한다는 응답률이 7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전부 기술로 대체되는 건 아니지만, DeFi 같은 신기술의 효력을 알게 된 이상, 은행들은 전통 은행업과 서비스에 변화를 촉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님이 사라진 은행은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작년 국내 은행들이 사상 최대 이익을 거뒀음에도 역대급 규모로 인력을 감축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지난달에만 KB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4곳에서만 희망퇴직 형태로 모두 1817명이 떠났다고 합니다. 은행권의 희망퇴직 연령도 예전보다 크게 낮아졌고요.
이제 은행은 비용에 더해 결제나 대출 등 금융기능의 편의성을 이업종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일례로, 보수적이기 그지없는 일본 메가뱅크 중 하나인 미쓰비시UFJ은행은 작년 12월 리크루트와 손잡고 ‘에어월렛’이라는 결제서비스 앱을 선보였습니다. 무료로 송금과 입출금을 할 수 있고, 미쓰비시UFJ은행은 물론 미쓰이스미토모은행과 여러 지방은행 계좌를 등록해 쓸 수 있습니다. 결제 수수료는 세금을 별도로 하면 0.99%, 세금을 포함하면 1.08%인데, 중간 비용을 없애고, 포인트 적립 등 판촉비를 제외한 덕분에 낮은 수수료 실현이 가능했습니다.
시중은행뿐만 아니라 중앙은행들도 이제는 기술력과 경쟁해야 합니다. 중국이나 유럽 등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 도입에 열을 올리는 이유입니다. 중앙은행들은 민간 기술 기업들이 자체 가상화폐를 만들고,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들이 확산하는 가운데 안정된 결제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비싸고 더딘’ 국제 송금에 대한 불만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미 남미의 소국 엘살바도르는 작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 국민 대부분이 ‘보이지 않는 돈’을 쓰고 있습니다. 은행업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필요 없는 시대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