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열정과 워싱]② ‘ESG 워싱’ 우려 커졌다

입력 2021-11-22 14:13수정 2021-11-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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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사회·지배구조(ESG) 열풍이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사업, 투자 등 관련 업계로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문제는 너도나도 ESG를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흉내만 내는 이른바 ‘그린 워싱’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늬만 ESG에 그치지 않도록 정의, 분류, 평가, 책임 등 명확한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장의 독단… 남양유업 무너졌다

올해 들어 재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 중 하나는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일가의 몰락이다.

남양유업은 지난 4월 자사 제품 불가리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발표 이후 사업 영위 자체가 어려운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커지면서 홍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책임을 지고자 남양유업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홍 회장 일가는 사모펀드(PEF) 한앤컴퍼니와 지분 전체(53.08%)를 3107억 원에 파는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 그렇게 57년 역사를 지닌 남양유업은 제대로 된 실사도 없이 3주 만에 허겁지겁 팔렸다.

남양유업의 몰락은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창업주의 제왕적 의사결정이 진짜 원인으로 꼽힌다. 사내이사 4명 중 3명이 홍 회장 가족으로 구성돼 외부 견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들이 무리하게 경영을 좌지우지했고, 무능한 위기관리와 시기를 놓친 형식적 사과가 한몫했다는 비판이 많다.

경영권 매각 소식이 전해진 뒤 20만 원을 오르내리던 남양유업 주가는 70만 원까지 치솟았다. 회사의 문제가 홍 회장 일가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독단적인 지배구조는 홍 회장 ‘눈물의 사퇴’ 이후 반년 넘도록 남양유업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이며 자식에게 경영권도 물려주지 않겠다”던 그가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이다.

홍 회장은 지난 9월 한앤컴퍼니와 맺은 지분 매각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이사회를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사로 재구성하려 했다. 그의 변심은 장남 홍진성 상무의 회삿돈 유용 의혹, 2013년 대리점 갑질과 매일유업 비방 사태, 황하나 씨의 마약 투약 논란 등에 이어 남양유업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남양유업은 회사 매각 결정과 번복으로 끝나지 않은 오너 리스크, 그리고 이를 둘러싼 법정 다툼 등 악재에 휩싸여 있다. 주가가 내리막을 타고 실적은 곤두박질하고 있다. 홍 회장 사퇴 발표 이후 한때 82만 원에 육박했던 주가는 지난달 38만2000원까지 떨어졌다.

실적도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남양유업은 지난 3분기 230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올해 적자 규모는 580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영업손실 771억 원)에 이어 적자 행진을 이어갈 게 확실시된다.

서용구 숙명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남양유업은 ESG를 외면하면 어떤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며 “사회 부문에서 대리점 갑질과 남녀 차별이, 지배구조 부문에서 홍 회장의 일가의 낙후한 결정구조란 결격 사유가 있었다”라고 판단했다.

서 교수는 “홍 회장의 진정성 없는 사과와 매각 결정 번복은 회사 가치를 떨어뜨렸다”면서 “경영실적 외에 사회, 윤리도 기업에 있어 필수과목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윤리강령 등의 기준을 하루빨리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양유업은 ‘불가리스 사태’ 한 달 전 투명한 지배구조를 구축하겠다며 ‘ESG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 바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ESG 경영에 대한 진정성을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일이다.

◇알맹이 없는 기업의 ‘ESG’ 외침

기업이 외치는 ESG 경영이 ‘보여주기식 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의 조사 결과 지난 6월 기준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과 대형 금융회사 874곳 중 110곳만 ESG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가운데 실질적 활동을 하는 곳은 68곳에 불과했다.

특히 30곳은 ESG위원회를 꾸렸을 뿐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나머지 12곳은 위원장 선임, 권한대행 순서 등 운영 방안을 논의하는 데 그쳤다.

ESG 경영 선언을 말로만 외칠 뿐 실철 방안조차 마련하지 않은 것도 문제로 꼽힌다.

ESG위원회를 설치한 110곳에 상정된 안건을 들여다보면 43%가량이 기존 이사회가 해오던 업무를 이관한 수준이었다. ESG 경영 방향 수립, 이행사항을 점검하는 안건은 약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고은 KCGS 선임연구원은 “안건의 상당수가 이해 상충 거래 심의나 반드시 이사회의 보고, 결의를 받아야 하는 내용이었다”며 “이는 ESG위원회를 세우기 전 이사회에서 논의되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ESG위원회에서 구체적인 활동을 논의한 28곳 중 15곳은 전사적인 계획 없이 활동만 수행했다”라면서 “ESG가 경영 전략에서 미온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ESG 경영의 모범적인 사례로는 신한금융지주가 꼽혔다. 신한금융지주는 ESG 경영활동을 이행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위험관리위원회에서 관련 위험 요인을 살피고, 전략위원회는 사회책임경영 전략을 수립하는 등 지속가능성을 사업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기술株?… ‘그린 워싱’ 주의보

최근 ESG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빠르게 확대되면서 녹색경영을 흉내 내는 ‘그린 워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린 워싱은 경영 성과나 실행 수준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ESG란 명칭을 붙여 홍보, 마케팅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을 일컫는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세계 2위 자산운용사인 미국 뱅가드 등이 내놓은 ESG펀드는 가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최다 보유 주식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애플, 테슬라 등 기술 종목이었다. EGS가 아닌 다른 투자 특성을 대표한 것이다.

ESG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하는 데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나왔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그린 워싱을 방지하기 위해 펀드 명칭과 관련한 규제를 대폭 강화할 뜻을 내비쳤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 프랑스금융시장청(AMF)은 ESG 금융상품 수요가 증가한 만큼 품질 보장을 위한 적절한 규제 요건이 존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린 워싱을 배제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ESG 도입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다.

이시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ESG 금융상품은 운용상황 등에 있어 투자자를 호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ESG 투자에 대한 관심이나 규모가 빠르게 커지는 만큼 적절한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평가의 불투명성, 투자 기준의 불확실성으로 소위 ‘ESG 워싱’ 우려가 커지고 있다”면서 “보다 명확하고 엄격한 녹색산업 분류가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ESG 평가 구성요소와 기관별 방식도 일관성을 높여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 연구위원은 “같은 회사 안에서도 환경, 사회, 지배구조 영역은 서로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며 “평가 결합 방식이 불분명한 가운데 정책적으로 표준화하는 것을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4일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열린 ‘불가리스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4일 서울 강남구 본사에서 열린 ‘불가리스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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