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임대보증보험 의무화, 집 주인·세입자 퇴로 열어줘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H빌라에 전세로 사는 한모 씨는 지난주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임대 보증금 보증(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는 못할 때 보증기관이 대신 갚아주는 상품) 가입을 문의했다.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등록임대주택(지방자치단체에 등록된 민간임대주택)인 한 씨의 전셋집은 임대 보증금 보증 의무 가입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HUG 측은 한 씨가 사는 집은 임대 보증금 보증에 가입할 수 없다고 답했다. 한 씨의 전셋집이 위반건축물(건축법 등을 위반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거실을 불법 증축한 게 화근이 됐다. 한 씨는 집값이 떨어지면 자칫 깡통전세(전셋값이 집값과 비싸거나 집값을 넘어서는 주택) 세입자가 될까 걱정이 많다.
위반건축물 세입자들이 임대 보증금 보증 사각지대에 놓였다. 임대 보증금 보증 의무 가입 대상이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이들은 그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국토교통부는 지난달부터 세입자 보호 강화를 위해 모든 등록임대주택 임대사업자는 임대 보증금 보증에 가입하도록 의무화했다. 임대 보증금 보증에 가입하지 않은 등록임대주택 임대사업자는 2년 이하 징역형이나 2000만 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한 씨처럼 임대 보증금 보증에 가입하고 싶어도 가입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HUG는 위반건축물은 임대 보증금 보증 가입 서류조차 안 받아준다. HUG 관계자는 "보증 사고가 발생하면 그 집을 경매에 붙여 대신 갚아준 보증금을 회수해야 하는데 위반건축물은 낙찰률이 낮아 회수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반건축물 소유주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법 위반 사항을 시정하는 것이다. 위반 사항을 바로잡아 건축물대장에서 '위반건축물' 꼬리표를 떼면 임대 보증금 보증에 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시정 공사가 진행될 동안 세입자는 집을 비워줘야 한다.
다른 한 가지 길은 임대사업자 등록을 말소해 임대 보증금 보증 가입 의무를 피하는 것이다. 최근 국토부는 위반건축물은 등록임대주택에서 직권으로 말소할 수 있다고 지자체에 안내했다. 임대사업자들은 "위반건축물까지 끌어들여 등록임대주택 확보 실적을 올릴 땐 언제고 이제 와 등록을 말소하려 한다"고 반발한다. 지자체도 직권 말소에 소극적이다. 세입자가 무제한으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할 수 있는 등록임대주택이 사라지면 지역 전·월세 시장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방안 모두 세입자 주거를 불안하게 만드는 셈이다.
위반건축물 소유주에겐 선택지라도 있지만, 그 세입자에겐 다른 대안도 없다. 세입자가 할 수 있는 건 임대 기간이 끝나고 집주인이 보증금을 무사히 돌려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올해 HUG에 접수된 임대 보증금 보증사고 규모가 7월까지 누적 3066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상황에서 자칫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매년 적발되는 위반건축물 수로 볼 때 일부 집주인-세입자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전국의 위반건축물 수는 올 2월 기준 12만 채가 넘는다. 서울에서만 4만7587채가 위반건축물로 적발됐다.
성창엽 대한주택임대인협회 회장은 "국토부가 무리하게 임대 보증금 보증 가입을 의무화하다가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진퇴양난 상황이 됐다"며 "무책임하게 직권 말소를 권고할 게 아니라 퇴로를 열어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