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인문학 저술가
고양이는 첫날부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거실과 서재, 방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탐색했다. 고양이는 소파의 위치, TV 같은 거실의 붙박이 가구들의 방향, 은신하기 적당한 구석들, 모든 움직이는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서가의 높은 곳을 유심히 살폈다. 천장과 맞닿는 서가 꼭대기로 가볍게 도약하는 고양이의 솜씨는 감탄할 만했다. 고양이는 낮이건 밤이건 많은 시간을 잠자는 데 쓴다. 그밖에 깨어있는 시간엔 장난감을 갖고 사냥놀이를 하거나 창밖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나 가끔씩 나뭇가지로 날아드는 새들의 움직임을 좇는다. 그리고 날마다 관내를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경찰관처럼 집 안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본다. 고양이의 탐색은 영역 동물다운 행동이다.
고양이는 낮 동안 창밖 풍경을 내다보고, 사료를 먹고, 낮잠을 자며, 하품을 하고, 시간 날 때마다 그루밍을 한다. 돌기가 돋은 거친 혀로 제 털을 가다듬는 그루밍은 고양이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 중 하나다. 고양이는 왜 그토록 열심히 그루밍을 할까? 그루밍은 고양이가 제 몸을 깨끗하게 건사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제 털에 묻은 사냥한 먹잇감의 냄새를 지워 포식자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던 야생의 습관에서 비롯된 행동일 테다. 고양이의 세계에서 그루밍은 탐색하기, 포획하기, 죽이기, 먹기, 잠자기와 같이 중요한 행동이다. 우리 집에 온 고양이는 건식보다 습식 사료를 더 좋아하고, 우리 몸에 제 몸을 부비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밤에는 우리 침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제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우리를 따라다니며 연신 야옹 소리로 먹이를 보채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고양이가 소파에서 우리의 쓰다듬는 손길에 반응하며 갈비뼈 아래에서 연신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낼 때, 우리 마음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곧추세운 채 부르르 떠는데, 그때는 우리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아름답지만 그다지 쓸모가 있지는 않다. 고양이는 눈동자보다 수염이나 긴 꼬리가 생존 이익에 더 기여한다. 고양이는 작은 소리에도 반응할 만큼 청각 능력이 뛰어나지만 근거리 시각은 썩 좋지 않다. 고양이가 시각보다는 입술 위쪽과 뺨에 난 뻣뻣한 수염들을 이용해 제 주변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고양이 수염에 뇌의 체성감각피질과 소통하는 수용기가 많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수염으로 온도나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제가 움직일 공간의 넓이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고양이가 사냥할 때 이 수염은 긴장으로 빳빳해지는데, 수염으로 먹잇감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신실한 수도사 같이 견결하고, 아주 높은 곳으로 도약할 때는 새 같이 가볍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고양이 걸음걸이를 보며 “우리 고양이 걷는 것 좀 봐. 참, 우아해. 마치 호랑이가 걷는 거 같애”라고 감탄했다. 이 낯선 손님의 길쭉한 허리를 쭉 펴고 진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며 움직이는 자태에서 맹수의 위엄마저 느껴졌다. 이들은 야생 고양이 시절부터 품은 맹수의 습관을 갖고 살아간다. 고양이는 가축화된 동물 중에서 신체적·생리적으로 쉬이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사람에 더부살이를 하며 그 쓸모가 거의 없는 밤의 파수꾼, 혹은 새 사냥꾼으로 살아가지만 제 안의 독립적 성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양이의 내면에 깃든 이 야성은 화강암 같이 단단한 고양이의 숙명일 테다. 하긴 살쾡이나 삵, 그보다 몸집이 큰 치타나 호랑이는 고양이와 같은 고양잇과 동물이니, 식성이나 습관, 걸음걸이 따위가 닮을 수도 있겠다.
지금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집고양이는 마흔 종을 웃돌고, 그 조상은 아프리카 들고양이라고 한다. 고양이는 근동 지방에서 집고양이로 더부살이를 시작하는데, 이는 약 8500년 전쯤에 일어난 일이다. 2500년 전 그리스, 인도, 극동 지역, 유라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퍼져나갔고, 오늘날엔 남극 대륙을 빼고 지구상 모든 곳에서 살아간다. 집고양이는 가축화된 동물 중에서 특별하고 예외적이다. 노동이나 고기를 제공하는 다른 가축화된 동물과는 달리 고양이는 심미적인 매력 때문에 반려동물로 인간의 선택을 받았다. 고양이의 신체에서 생산되는 것들에서 사람이 얻는 이익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고양이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반려 관계, 감정적 교감, 즉 애착과 사랑을 통해 굳세지는 정서적 유대감이 전부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증거들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면 야생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된 것은 대략 1만5000년 전이다. 가장 먼저 인간과 함께 살기 시작한 동물은 개다. 개는 사냥, 목축, 방호, 경주, 짐을 나르는 데 쓰기 위해 길들여졌다. 그 다음 염소, 양, 돼지, 소 등이었다. 말, 당나귀, 낙타, 물소, 야크, 닭, 오리 들이 뒤를 이었다. 동물의 가축화는 인간과 동물이 환경과 자원을 공유하는 한에서 상호 이익이 되었다. 야생 동물은 자유와 야생성을 포기한 대가로 인간에게 은신처와 먹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았다. 반면 동물은 인간에게 젖과 털, 가죽, 피, 배설물 따위를 주고, 농업이나 목축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인간은 사육 목적에 맞춰 인위적인 교배로 새로운 품종을 만든다. 돼지나 육우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게 자신의 신체를 바꾸었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은 항상 상호이득을 얻는 방식으로 협력을 한 게 아니다. 동물의 가축화가 동물의 복지를 위해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아니라는 뜻이다. 동물의 가축화는 동물의 신체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우리 곁에 사는 가축화된 동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개량된 존재들, 즉 유전적 조작, 인위적 거세, 부리 자르기 등과 같이 신체를 비가역적으로 바꾸는 시도가 이어진 결과물들이다,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사람 곁에 온 야생의 존재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삶의 권리나 학대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일까? 자연 안에서 인간이나 동물은 동등하게 제 생명을 제 방식대로 누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동물은 가축화되면서 그 권리를 잃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동물은 사회적으로 인류의 핍박받는 열등한 형제이고, 철학적으로 ‘세계의 가난’이며, 정치적으로 인류의 지배 아래에 있는 식민지다. 인간은 동물을 도축하고, 신체를 분해하며, 젖과 고기와 가죽을 빼앗는다. 가축화된 동물은 신체와 본성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길들여진 개는 먹이와 보금자리를 얻고 그 대신에 야생에서의 생존 능력과 종의 다양성을 상실했다. 유기견이나 버림받은 집고양이는 야생에서 척박한 생애를 보내다가 턱없이 짧은 생을 마친다. 질병이나 로드 킬, 혹은 인간의 학대로 그 누구의 애도도 없이 죽어가는 동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은 당연한 일인가? 우리의 양심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동물의 도덕적 지위와 동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