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웰빙, 욜로, 소확행, 벼락거지

입력 2021-05-12 05:00수정 2021-05-1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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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환 정치경제부 부장

한국인의 가장 큰 장점을 꼽아보라면 어지간한 위협으로는 그들의 긍정 회로를 망가뜨릴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지고 말겠다는 한국 사람들은 그들 고유의 정서가 한(恨)이라던 새빨간 거짓말을 걷어차고 스스로를 ‘흥의 민족’이라 부르는 경지에 올랐다.

물론 흥이 오르는 배경에는 경제 대국의 위력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등 따시고 배불러서 노래가 절로 난다면, 동네 강아지도 금목걸이를 차고 다녔다던 신라 시대가 한반도의 황금기였어야 한다.

우리는 풍족하지 않아도 춤추고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라가 망해 여기저기 손 벌리는 지경이 왔어도, 금융위기로 시장이 거덜 나는 상황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흥으로 행복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놀 줄 아는 우리의 면모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통해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키워드는 ‘웰빙(Well-Being)’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막 끝낸 뒤 이제 다시 잘 먹고 잘살자며 스스로 피로감을 달랬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온 이명박 대통령 때는 욜로(YOLO)가 등장했다. 반복되는 경제위기에 “한 번 사는 인생 까짓 거 하고픈 거 다해 보고 죽자”는 배짱이 생겨난 모양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보)’이 대세였다. 답답한 현실이 가슴을 옥죄어도 소박한 기쁨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의지의 결과였을 테다.

문재인 대통령 4년의 일상적인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적폐청산 같은 거창한 구호야 하루하루 살기 바쁜 소시민에겐 남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니 제쳐 두자. 벼락거지, 패닉바잉, 빚투 등 흥은커녕 화를 돋우는 단어들이 계속 맴돈다. 가까스로 떠올려지는 긍정의 단어는 일상회복 정도뿐이다.

누군가 ‘문 대통령에게 가장 실망스러운 면모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의지를 꺾어놨다”는 대답을 내놓고 싶은 이유다. 집 팔아라, 일본 미워해라, 세금 더 내라 등등 대통령이 다 같이 뭉쳐 해달라는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개개인은 행복을 도모할 짬이 별로 없었다.

문 대통령이 처음 취임할 때만 해도 달랐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불행을 어깨동무와 노랫소리에 묻어버리고 새 출발했다. 그런데 다시 행복해지기로 한 지 4년이나 지났지만, 어찌 된 일인지 흥에 겨웠던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분노나 혐오 같은 불쾌감이 이끼처럼 잔뜩 끼어 있다.

핑계는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악재 속에 문 대통령과 현 정부는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에 청와대나 정부가 실질적인 도움을 준 기억은 많지 않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로 대표되는 K방역은 정부가 고안해낸 신묘한 계책보다는 어설픈 정부에 익숙한 대중들이 오랜 세월 닦아온 셀프 생존 본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문 대통령은 맥이 풀리는 행보로 긍정의 민족이 애써 끌어올리려는 흥에 재를 뿌리지는 않았나 걱정된다.

약국에 직접 가본 지 적어도 수년은 됐을 법한데 “마스크 충분하니 약국 가서 확인해 보라”며 호통치던 대통령, 평생 부동산 중개업소 문을 두드려본 적은 있을까 싶은데 “집값 안정되고 있으니 사지 마라”며 가짜 뉴스를 퍼트리던 대통령, 평생 이력서 한 번 내본 적 없을 듯한데 “일자리가 크게 늘고 취업자도 엄청 많아졌다”며 자화자찬하는 대통령을 보았다.

하기야 언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대통령 잘 만나 신명 났던 적이 있었나.

물론 그렇다고 희망을 버릴 우리가 아니다. 솔직히 국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 기대한 적도 없지 않은가. 평등하지 않아도, 불공정해도, 정의롭지 못해도 미나리를 닮은 우리의 흥은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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