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₂& H₂O' 내년 2월 28일까지
양혜규는 생명 유지의 필수 요소인 산소(공기)와 물은 자연 상태에선 물리적 현실이지만 인간이 고안한 화학기호에선 'O₂', 'H₂O'와 같이 특정하게 추상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간이 감각하는 경험의 추상적 성질을 미술 언어로 추적해온 작가다운 발상이다.
29일 개막한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O2 & H2O' 전시는 우리의 현실만큼 혼종(混種)적인 전시다. 과학적 사실계, 그 사실을 오롯이 인지할 수 없는 경험과 감각을 포함한 지각계, 기후, 재난 등 점차 극단으로 치닫는 현상계를 총체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화두를 던진다.
전날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양혜규는 이번 전시에 대해 "3년여 간 미술관과 협업해 준비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신작을 포함한 약 40점의 작품으로 국내 관객을 만난다. 양혜규의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자동차 후원으로 2014년부터 매년 국내 중진 작가 1명의 개인전을 여는 'MMCA 현대차 시리즈'의 7번째 전시다. 이번 전시 오디오 가이드는 배우 정우성이 재능 기부로 참여해 양혜규의 주요 작품을 설명한다.
양혜규는 다양한 사회문화권에서 형성된 지식, 관습, 현상을 초월적인 시공간에서 '환상적인' 시각 언어로 구사한다. 방울과 인조 짚을 사용한 '소리 나는 가물家物'과 '중간 유형' 등의 조각 작품군을 생성했다.
형태적으로 생명체와 기계, 사물과 인간 사이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양혜규의 조각-존재는 설화적 기괴함과 친근함 마저 자아낸다. '전시 속 전시'로 마련된 목우공방의 '108 나무 숟가락'은 작가의 지인 김우희 목수의 글과 숟가락을 전시하는 코너 속 코너다. 일상, 지역, 공동체, 공예적 수행성 등의 의미를 오늘날에 비춰 볼 수 있다.
서울박스와 5전시실에 걸쳐 조성된 전시 환경은 민감한 접촉과 움직임을 유도한다. 통로-벽체, 문손잡이, 블라인드와 같은 일상적 요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 또는 적층돼 일종의 성좌를 그린다.
서울박스에 설치된 높이 10m에 달하는 블라인드 조각 '침묵의 저장고-클릭된 속심'은 비스듬한 블라인드의 물성을 활용하는 작가의 최근 성향을 반영한다. 5전시실에서는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큐브형 원작을 각각 '3배로 축소'하고 ‘21배로 확장'해 다시 하나의 커다란 큐브로 완성되는 두 개의 '솔 르윗 뒤집기'를 선보인다.
복도에 설치된 디지털 콜라주 현수막 '오행비행'과 벽지 '디엠지 비행'은 물질과 상징, 에너지와 기술, 기후와 사회적 양극화, 재해와 국경 등 우리가 마주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룬다. 음성 복제(클로닝, cloning) 스타트업 네오사피엔스와의 협업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복제해 만든 인공지능 목소리 '진정성 있는 복제'는 정체성, 진짜, 유일함 등 진정성 있는 가치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양혜규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재개관전에 작품을 선보이는 등 국제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덴슐레 순수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양혜규는 지난 1월 한국에 왔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지면서 계속 머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대 문명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찰도 있었다. 양혜규는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일과 출장 여행, 무한 퍼포먼스를 개인에게 요구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조용히 멈추고 쉬게 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싶다"며 "미술 시장의 속세화 같은 것을 성찰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팬데믹 위기가 우리 속의 열정까지 죽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며 "국제적인 커뮤니티가 생기고 정보로만 접하던 땅과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능력이 지난 20~30년간 키워졌는데 그것마저 잃으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전시와 함께 양혜규의 국내 첫 한국어 선집 '공기와 물: 양혜규에 관한 글모음 2001-2020'이 출간된다. 지난 20년간의 작품 활동에 관한 국내외 미술계 필진의 글 36편을 연대순으로 엮은 책이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