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김유진 기자
“모 대기업과 계약을 했는데 계약금이 없더라고요. 몇 년 전까진 계약금을 줬는데 말이죠.”
최근 만난 중소기업 대표이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불황이 깊어지면서 그동안 상생을 외쳤던 일부 기업들의 계약 행태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성장 기조에 들어서면서 계약금 없이 대금만 나중에 지급하는 곳이 생기기 시작했고, 요새는 코로나19로 조금이라도 대금을 천천히 주려고 계약금이 없어진 곳이 종종 있다”며 “계약 이행을 위해 사전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거래를 이어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글로벌 경기가 침체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았던 국내 기업들은 최악의 경영환경을 맞닥뜨렸다. 실제로 올해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예측되며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역성장할 것으로 보이고 기업들도 사업 구조조정, 유동성 확보 등 다양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사에 지급해야 하는 계약금도 조정의 대상이 됐다. 위기 상황에선 유동성 확보를 통한 생존을 우선순위에 두는 건 당연하다.
이와 관련해 해당 기업들에 문의하니 “업계 관행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들 그렇게 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냐'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그동안 이들 기업이 “협력사는 한 식구”라고 외쳤던 홍보 문구가 무색해졌다. ‘상황이 좋을 때만’, ‘다른 회사가 할 때만’이라는 전제 조건을 표기해야 했지 않을까.
다른 기업에도 계약금에 관해 물었다. 4대 그룹 관계자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협력사에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협력사는 미리 준비하는 과정에서 빚을 지거나 최악의 경우 계약 이행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동반성장, 상생 차원에서 계약금을 지불하고 있다”고 답했다.
협력사와의 상생이 선심성 지원을 통한 선전 문구로 사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협력사의 희생이 곧 대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졌던 철저하게 경제적 가치에만 기반을 뒀던 산업 생태계는 무너졌다.
이젠 사회와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가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됐다. 과거의 ‘성공의 함정’에서 빠져 새로운 시대에 상생을 저버린다면 실패의 확률이 커져 버리는 때가 된 것이다.
과거 숱한 위기를 겪어 홀로 살아남고 아직도 이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기업들에 말하고 싶다.
“법적으로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볼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