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乙들의 전쟁] “시험 통한 취업이 공정… 정치논리에 ‘룰’ 깨졌다”

입력 2020-07-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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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국공 사태’ 취준생들의 항변

어떤 업무가 국민 생활 안전과 밀접하기 때문에 정규직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은 직무에 관한 문제지 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하는 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가치에서 와야 합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권혁재(27세·경기 고양) 씨는 최근 벌어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직고용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이어갔다. 권 씨는 이번 논란을 대하는 취업준비생들의 시각이 단순히 ‘타인의 행운을 시샘하는’ 정도로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비정규직 ‘자리’와 비정규직 ‘인원’의 정규직화를 왜 동일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그간 힘든 일 했으니 정규직으로 해주겠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논리”라고 말했다.

이투데이는 지난 10~13일 노량진 고시촌을 비롯한 거리 곳곳에서 취업준비생들을 만나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질문을 받은 취업준비생 대부분은 이번 사안을 ‘공정하지 않은 채용’으로 봤다. 대부분의 답변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인식은 ‘누군가를 채용했다면 그 정당성을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들 상당수는 ‘노력과 보상’이라는 취업시장의 룰이 정치적 논리에 훼손된 사건으로 이번 사태를 인식하고 있었다.

◇ 정규·비정규 아닌 절차의 문제…결과적 평등은 공정한가= ‘공기업 올인형’ 취준생이었던 이모(27·서울 강서) 씨에게 ‘인국공 사태’는 남 일 같지 않다. 이 씨는 재작년 8개월 가까이 인천국제공항 사무직군을 지원했지만, 최종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씨는 “나는 노력을 들여 경쟁을 뚫고 마지막 단계인 면접에서 탈락하면 바로 좌절인데,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들은 아니다”라면서 “(인국공 사태가) 굉장히 불공평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엄격히 구분 짓는 취업준비생들의 인식을 두고 ‘계급을 나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곳곳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상당수는 단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아닌 ‘절차의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1년 넘게 공기업 입사 준비 중인 김모(27·서울 양천) 씨는 “애당초 사람을 뽑을 때 정규직으로 뽑았으면 될 일”이라며 “처음에 비정규직으로 뽑아놓고 중간에 전환하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들이 특히 불쾌하게 여기는 부분은 현 정부가 취업시장의 ‘합의된 룰’을 깨뜨렸다는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모든 지원자가 같은 시험을 통해 투명하게 경쟁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명준(26·서울 송파) 씨는 “현재 정권에선 열심히 노력하기보다, 약자가 되거나 약자처럼 보여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정부는 ‘과정’에서 평등한 취업시장이 되도록 하는 감시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 “‘노력과 보상’의 원칙이 정치 논리에 무너졌다”= 취업준비생들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흐름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노력과 나의 노력 사이에 엄격하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보다 덜 노력한 누군가가 더 많은 혜택을 갖는다면 공정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이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취업이 어려울수록 이와 같은 ‘과정의 공정함’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취업준비생들은 강조했다.

전기직 엔지니어로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동근(27·서울 종로) 씨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천공항 방문 후 달라진 채용 정책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채용 정책이)지극히 정치적이고 국회의원들 발언 모두 속 보인다”며 “분노의 이유는 정치권의 행동 때문이다”라고 했다. 권혁채(27세·경기 고양) 씨 역시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내가 노력해서 뭐하나’ 싶은 박탈감을 느낀다”며 “저들은 운이 좋아 정규직이 되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와 코레일 등 공공기관에서 과거 비정규직 정규화 이후 신입 채용 규모가 줄어들었던 사례를 언급하며 ‘장래 일자리’가 감소할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는 박민지(23·서울 성북) 씨는 서울교통공사와 코레일의 사례를 언급하며 “어떻게 됐든 취준생에게 피해가 갈 게 분명한 상황”이라며 “대응책은 전혀 없이 지금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건 서울교통공사나 코레일 채용 때처럼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결과적 평등이 아닌 공정한 경쟁”…취준생이 말하는 일자리 정책= 몇몇 취업준비생은 정부를 향해 공정한 일자리 정책을 펼쳐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이주형(27·서울 노원) 씨는 “제발 정규직화, 노동의 정상화라는 결과적 정의를 위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못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주기 바란다”며 “지금이라도 일련의 정책에 피해를 입고 소외되고 박탈감을 느끼는 취업준비생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공정한 정책을 시행해달라”고 호소했다.

비단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뿐 아니라 ‘고졸 채용’ 등 정책 차원에서 추진되는 채용이 과정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비판도 나왔다. 일반 회사에 다니며 공기업 이직을 준비 중인 이유빈(28·서울 서대문) 씨는 “기회를 주는 것까지야 상관이 없겠지만, (고졸 채용 전형의 경우) 더 쉬운 난이도의 시험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되게 허무하다. 여태까지 해온 것들을 보상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약간 좀 ‘시대를 잘못 타고났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토로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20대 취업준비생들의 노력에 더욱 공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모(26·서울 강서) 씨는 대학원 졸업 후 유학을 준비 중이다. 한 씨는 “20대 학생들이 취업에 대한 문제를 꽤 오랫동안 어려움을 토로해 왔음에도 그것을 투어린 학생들의 투정처럼 여기시는 분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며 “어쨌든 희망은 있겠거니 하면서 ‘존버’(열심히 버티다)를 해왔는데 그것에 대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절망을 체감하게 된 점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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