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자들 “죽은 도시 같다", "이리 가시면 안 된다" 오열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향 창녕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박 시장의 발인은 13일 오전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지만 유족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100여 명이 모여 박 시장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박 시장의 발인은 이날 예정된 시간보다 빠른 오전 7시께 진행됐다.
서울시장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인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 홍영표·서영교·기동민·김성환 민주당 의원,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도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기 위해 모였다.
많은 취재진이 발인식을 취재하기 위해 모였다. 박 시장의 일부 지지자들도 이른 아침부터 참석해 발인을 지켜봤다.
오전 7시 10분께 박 시장의 관이 운구차에 실렸다. 운구차를 찍으려는 취재진과 버스에 탑승하려는 참석자들이 몰리면서 다소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7시 40분 박 시장의 운구차가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시청에 도착했다. 고인의 영정사진과 위패는 서울 세종대로 서울시청에 도착한 뒤 정문에 들어왔다.
박 시장의 지지자들이 오열하며 운구 행렬을 뒤따랐다. 영결식 참석자 중 일부는 흐느끼거나 울먹이며 게이트를 통과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온 정모(50ㆍ여) 씨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며 “서울에 박원순 시장이 없으니 죽은 도시 같다”고 울먹였다. 이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언론에서 떠드는 것 진실 규명 해야한다”며 “그럴 분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마포에서 온 구모(63ㆍ남) 씨는 박 시장의 영정사진을 보자마자 “이리 가시면 안된다. 시민 시장님 나쁜 곳 없는데로 가세요”라고 오열했다.
박 시장의 영결식은 오전 8시 30분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사회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서울시청을 떠난 박 시장의 운구차는 오전 10시 41분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했다. 8분이 지나고 관이 차량에서 내려오자 유족과 추모객들은 오열했다.
유족들은 위패와 영정을 들고 1층 고별실로 향했다. 서울추모공원에는 총 11개의 화로가 있었다. 박 시장의 시신은 '1번 화로'로 들어갔다. 오전 10시 57분 화장이 시작됐다. 100여 명이 넘는 추모객으로 공원 내부는 가득 찼다. 유족들은 2층에 있는 4번 대기실로 들어갔고, 이낙연·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추모객들은 1층 쉼터와 2층 카페테리아에 자리 잡았다.
화장 진행 상황이 공원 내부 스크린에 표시됐다. 진행 상태가 '접수'에서 '화장 중'으로 바뀌자 이를 쳐다보던 추모객들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검은 정장 차림의 한 추모객은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서울 서초구에서 서울추모공원을 찾은 신모 씨는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쪽 손에는 '박원순 시장님 사랑합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낮은 자세로 시민을 위해 정치를 하다 가셨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충격이었다"며 "토요일 시청에 있는 분향소를 찾았고, 오늘도 창녕까지 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12시 23분 '화장 완료'가 스크린에 표시되자 유족들과 추모객들이 수골실로 모였다. 멀리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렸고 몇몇 추모객은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유족들은 12시 35분 유골함을 들고 운구 차량으로 걸어갔다. 박 시장의 영정과 유골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물만 남았다.
낮 12시 49분. 박 시장의 영정과 유골함을 실은 운구 차량이 경남 창녕으로 출발했다. 이를 지켜보던 추모객은 고개를 숙이거나 “안녕히 가십시오. 남아 있는 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잘 가세요”라고 말하는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박 시장을 떠나보냈다.
박 시장의 묘소는 유족의 뜻에 따라 얕고 살짝 땅 위로 솟은 봉분 형태로 마련된다.
1956년 3월 23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난 박 시장은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진학했다. 하지만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4개월을 복역하고 제적을 당했다. 이듬해 단국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박 시장은 1980년 22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됐지만 1년 만에 검사복을 벗어 던졌다.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고(故) 조영래 변호사를 만나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등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굵직한 사건을 맡았다. 특히 박 시장은 1993년 ‘성희롱은 명백한 불법행위’라는 인식을 알린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박 시장은 1994년 참여연대를 설립하고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을 창안해 사회운동 분야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천ㆍ낙선 운동’, ‘1인 시위’ 등이 그에게서 시작됐다. 2002년부터는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해 기부문화 확산과 사회적 기업 설립에 앞장섰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정치권에 발을 들인 박 시장은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사퇴하면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승리했다.
박 시장은 취임 이후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라는 경력을 바탕으로 서울시정의 틀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제기되는 등 정치권의 견제가 이어졌지만, 안정적으로 시정을 이끌며 2014년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3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임기 동안 ‘강북 균형발전’, ‘공공 와이파이’, ‘제로페이’ 등 친서민 정책으로 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