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의 오토 인사이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라…자동차 프로모터(Promoter)

입력 2020-06-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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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전략과 제품의 특징 전달…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

2007년 1월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일 때였다.

행사의 주인공은 단연 아이폰. 그러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 역시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아이폰 프레젠테이션(PT)은 21세기 최고의 PT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잡스의 간결하고 날카로운 PT는 청중의 뇌리를 자극했다. 종이와 펜만 들지 않았을 뿐, 다분히 아날로그적이었다.

세상에 처음 나오는 첨단 전자기기를 소개하는 마당에 어렵고 딱딱한 설명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잡스는 이를 간파해 ‘스토리보드’ 개념을 도입했다. 장황한 설명 대신, 하나의 문장으로 간결한 비유를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그의 이런 PT 전략은 훗날에도 이어졌다. 잡스는 애플의 ‘맥북’을 선보이며 한 마디로 이를 정의했다. 그의 언어는 놀랍게도 단순했고 명료했다.

“세상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입니다.”

▲크리스 뱅글은 자동차 업계 최초의 디자인 프로모터였다. 이례적으로 제품 개발의 뒷면에만 자리하던 디자이너들이 속속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때였다. 200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BMW 5시리즈 론칭에 나선 뱅글(오른쪽)의 모습. (사진제공=BMW그룹미디어)

◇브랜드 전략과 제품 특징 전달하는 프로모터=스티브 잡스의 PT처럼, 브랜드 전략을 포함해 제품의 특징 등을 전면에 나서서 설명하는 이들을 ‘제품 프로모터(Promoter)’라고 부른다.

이들은 글로벌 주요 제조사의 얼굴이기도 하다.

프로모터는 애초 예능인이나 프로 운동선수의 흥행을 기획하는 사람을 뜻한다. 여기에서 시작해 제조사의 신제품 발표회 때 전면에 나서 이를 알리고 설명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브랜드 전략에 대한 뚜렷한 이해도는 필수다. 여기에 차량 메커니즘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갖춰야 한다.

전자업계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있었다면 자동차 산업에도 그에 걸맞은 인물이 존재한다.

BMW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Chris bangle)'이다.

2001년 BMW의 최고봉인 7시리즈가 4세대(E65)로 거듭나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대명사였던 BMW가, 그것도 최고급 모델을 내놓으면 경박스러운 디자인을 앞세웠던 탓이다.

전 세계 BMW 마니아들이 혹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새 모델이 나오면 으레 호불호가 뚜렷하게 나뉘기 마련이지만 당시 혹평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후 크리스 뱅글의 손을 거친 BMW는 출시 때마다 논란을 불러왔다. 그나마 판매가 성공해 다행이었다.

BMW그룹은 마침내 브랜드가 추구하는 디자인 전략을 강조하기 위해 글로벌 주요시장을 대상으로 프로모터를 내세웠다. 디자인 총책임자 뱅글이었다.

▲크리스 뱅글이 디자인한, 2001년 등장한 BMW 4세대 7시리즈의 모습. 보수적인 독일 고급차 브랜드로서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크리스 뱅글의 작품이다. (사진제공=BMW그룹미디어)

그는 BMW 주요 모델이 발매하는 세계 시장 곳곳을 찾아가 디자인을 해설했다. 뒷바퀴 굴림 차의 디자인 특성과 스포티를 강조해온 BMW의 브랜드 전략을 속속들이 끄집어내 설명했다.

당시 크리스 뱅글의 PT 역시 완성차 업계에서 화제를 불러모았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BMW 디자인이 지닌 철학적 의미를 설명했다. 무엇보다 자동차 관련 전문용어를 철저하게 걷어내며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던 것도 특징이다.

누가 들어도 쉽게 숨어있는 디자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본격적으로 프로모터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때도 2000년대 후반부터였다.

◇잡스 겨냥한 삼성전자, 크리스 뱅글에 러브콜=훗날 크리스 뱅글이 BMW를 떠나자 자동차 업계는 물론, 전자 회사까지 나서 그를 ‘스카우트 0순위’로 꼽았다.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준비 중이었던 현대차 역시 뱅글 영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동종(자동차)업계 이직금지 협약을 피하고자 주춤하던 사이, 냉큼 삼성전자가 크리스 뱅글을 스카우트하는데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크리스 뱅글을 갤럭시 프로모터로 점찍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갤럭시를 들고 무대 위에 올라설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려한 외모와 고급스러운 영어, 뚜렷한 전달력 등 뱅글은 최적의 인물이었다. 다만 크리스 뱅글이 디자인에 몰두한 나머지 삼성전자의 전략은 실제로 이행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삼성전자는 브랜드 프로모터로 로레알 출신의 이영희 부사장을 영입해 전면에 내세웠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겨냥한 삼성전자는 브랜드 프로모터로 글로벌 마케팅 담당 이영희 부사장을 내세웠다. 브랜드 전략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 제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까지 모두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 (사진제공=삼성전자)

◇기아차의 피터 슈라이어의 등장=국산차 메이커에 본격적인 브랜드 프로모터가 등장한 것은 2008년 기아차가 영입한 디자인 총책임자 피터 슈라이어부터다.

당시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경영전략으로 ‘디자인 기아’를 앞세웠다. 더 과감하고 역동적이며, 스포티한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게 디자인 전략을 전면 개편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걷어내고 과감한 도전 정신과 스포티 브랜드로서의 특징을 앞세웠다.

파격적인, 나아가 스포티 디자인을 추구한 정 사장은 폭스바겐에서 잔뼈가 굵었던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전격 영입했다.

K5에서 시작한 기아차의 세단 K시리즈를 완성한 피터 슈라이어는 훗날 현대ㆍ기아차 디자인 총책임 자리까지 올랐다.

▲2015년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 담당 부사장(당시)이 2세대 K5 출시 행사를 통해 디자인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피터 슈라이어는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디자인 프로모터였다. (사진제공=기아차)

크리스 뱅글이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이름난 프로모터로 등장했다면, 피터 슈라이어는 한국시장에서 본격적인 프로모터로 나섰다.

종이와 펜을 앞세워 기자단 앞에서 뚝딱 2세대 K5 초기 렌더링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 속에서 개발과정에서 기아차가 의도했던 전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

그냥 바라보기에도 멋진 기아차는 개발 과정에 숨은 디자인 전략까지 드러내며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 신차 발표회에는 이처럼 실무진의 등장이 눈길을 끈다.

넥타이를 조여 맨 임원이 아닌, 실제로 밤잠을 줄여가며 신차를 개발한 연구진이 등장해 새 모델을 소개하기도 한다.

국내 완성차 메이커도 이런 브랜드 전략을 앞세워 점진적으로 글로벌 추세에 합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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