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요즘처럼 남의 사과문을 실시간으로 본 적이 있을까요? 평생 대면식도 없던 사람의 잘못부터 필체, 진심까지 마주하고 있는데요.
이 사과문이 참 말이 많습니다. 사과문이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담은 문서이건만, 왜 다들 화가 난 걸까요.
무려 자필 사과문에도 불구, 그 사과의 진정성에 의문이 들기 때문인데요.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분노케 했을까요.
MBC ‘부러우면 지는거다’에 동반 출연 중인 이원일 셰프와 김유진 PD의 사과문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8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인 이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다정한 모습을 공개했는데요. 그런데 대중 앞에 얼굴을 공개한 김유진 PD의 과거가 한 네티즌의 폭로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학창시절 뉴질랜드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김유진 PD가 또래 한국인 여러 명과 한인 여학생을 집단폭행했다는 건데요. 피해자라고 밝힌 A 씨의 글이 공개되자 김유진 PD의 TV 프로그램 하차와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습니다.
이에 이원일 셰프와 김유진 PD는 자필로 사과문을 올렸는데요. 둘이 약속이나 한 듯이 비슷한 내용의 사과문이었죠. 네티즌들은 두 사람의 사과문 중 ‘사실 여부를 떠나’, ‘사실을 떠나’라는 문구에서 멈칫했습니다. 마치 집단 폭행은 사실이 아니지만, 이런 의혹이 제기된 점에 사과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죠.
이에 피해자 A 씨는 새로운 증거와 사례를 게재했고, A 씨 외에 뉴질랜드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까지 등장했습니다.
비난이 거세지자 이원일 셰프와 김유진 PD는 추가 사과문을 게재했는데요. ‘사실여부를 떠나’라는 문구는 인정의 여부가 아니라 일단 사과가 먼저라는 의미라고 해명하기도 했죠.
이들의 사과문이 포털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사과문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문구’가 다시 회자되기도 했는데요. 이 사태가 있기 훨씬 전 한 네티즌이 정리한 글입니다. ‘본의 아니게’, ‘그럴 뜻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신중하게’, ‘사실여부를 떠나’,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을 꼽았죠. 네티즌들은 또 다른 이의 사과문이 올라올 때마다 이 글이 다시 화제가 될 거라는 씁쓸한 한줄평을 남겼습니다.
전문가들은 사과문에 필수조건은 ‘C.A.P’라고 입을 모으는데요. C는 Care&Concern(관심과 걱정), A는 Action(행동 조치), P는 Prevention(예방 또는 방지)입니다. 이 C.A.P가 모두 들어간 올바른 사과문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과문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메르스 사태가 벌어졌던 2015년 6월,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는데요.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초기 대응 실패의 진원지가 됐다는 비판에 대한 사과였습니다.
이날 이재용 부회장은 미흡한 초기대응에 고개 숙여 사과하고, 그룹 차원의 지원과 개선책을 약속했는데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과 변명 없는 사과, 아픔에 대한 공감, 확실한 방지책까지 완벽했다는 평가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문 발표 이후 여론의 공감을 얻으면서 삼성그룹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오르기도 했죠.
사과문에 ‘자필’이 꼭 필수인 건 아닙니다. 2015년 SBS 연예대상 진행 직후 비난이 쏟아졌던 전현무도 자신의 SNS에 사과문을 올렸는데요. 전현무는 대상 후보 인터뷰에서 강호동을 깎아내리는 듯한 질문을 이어가 논란이 됐습니다.
전현무는 방송 다음 날 SNS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따끔한 지적을 받아들이고 부족한 점을 인정했습니다. 또 강호동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의 뜻을 전했다고도 덧붙였죠. 경솔했던 행동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네티즌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하며 논란을 종식했습니다.
사과문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문구도, 어려운 단어도, 정갈한 글씨도 아닙니다. 벌어진 사태에 대해 진정으로 죄송한 마음을 담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억울한 마음에 불평하기보단, 우선 피해를 받은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것이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