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공대위에 ‘배상’아닌 ‘보상’ 제안…은행들 잇따른 배상안 거부에 영향 미쳤을 것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 피해기업들을 대변하는 공동대책위원회 측에 ‘배상’보다 ‘보상’ 이라는 입장을 전달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은성수 위원장이 지난 11월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조위) 결과를 앞두고 가진 키코 공대위와 면담에서 은행 상품 판매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배상안이 아닌, 적법한 행위를 전제로 손실을 보존해주는 차원의 보상안을 제시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금융당국의 키코 사태에 대한 후속조치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은행 5곳(신한·산업·하나·대구·한국씨티)이 키코 피해와 관련, 총 213억 원의 배상 권고안을 놓고 금감원에 반기를 든 현상이 금융당국 수장의 결정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5일 이투데이 취재 결과 은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키코 사태와 관련한 금감원 분조위 결과가 나오기 직전 키코 공대위와의 면담에서 윤석헌 금감원장의 결정과 정면 배치되는 입장을 전달했다. 키코 사안을 놓고 양 기관의 첨예한 갈등이 현재 진행형이란 분석이다.
해당 면담에서 은 위원장은 “은행권이 배상이라는 단어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니 자율적으로 기금을 조성해 보상해주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했다. 이에 키코 공대위는 분조위 결과가 곧 발표되기 때문에 무조건 배상안으로 가야 한다고 강하게 거절 의사를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은 위원장은 “당시 면담에서 배상안과 보상에 대해 얘기한 기억이 없다. 그때 공대위가 ‘확답은 없었지만 경청해줬다’라고 언론에 말했듯이 그것이 전부였고, 대출 등 다른 방법으로 도울 길이 있는지 고민해보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배상안에 강한 거부 입장을 내세우는 이유는 배상과 보상이 가지는 법률적 의미에 확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배상은 행위자의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하는 용어다. 구체적으로는 행위자의 위법적 행위로 남에게 끼친 손해를 전보해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와 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일을 말한다. 은행들이 배상안을 받아들이면 키코 상품 판매의 불법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또한, 금감원 분조위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나머지 147개 기업에게도 모두 배상을 완료해야 한다.
반면, 보상은 행위자의 적법한 행위에 의해 특정인에게 가한 재산상의 손실을 갚는 것을 말한다. 은행들이 보상안을 받아들이더라도, 키코 상품 판매가 적법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행들은 자율적으로 보상 기준과 금액을 결정할 수 있다. 또한, 보상 의무가 없음에도 기금을 조성해 피해 기업들을 돕는다는 시혜적 의미에 더 가깝다.
실제로 은행들은 이사회 회의에서 배상과 보상의 차이를 정확이 파악하고, 배상이 아닌 보상으로 가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앞서 씨티은행은 지난 달 5일 금감원 분조위 배상안 거부 입장을 밝히면서 “법원 판결을 받지 않은 기업 중 금감원이 제시한 일부 기업에 대해선 사실관계를 확인해 법원 판결에 비춰 보상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고려중”이라고 말했다.
이투데이가 입수한 씨티은행의 2월 13일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박진회 씨티은행장은 “일부 배상안에 따를 경우 배상을 못 받는 업체 쪽에서 이의 제기할 가능성이 있고, 일괄 거절할 경우 키코 공대위에서 계속 이슈를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이후 박진회 은행장은 3월 4일 열린 이사회에서 “일종의 사회적 기여라는 측면에서 배상이 아닌 보상이라는 개념이 보다 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다.
업계 관계자들은 6일까지 금감원 분쟁조정안 수용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대구은행 역시 씨티은행처럼 배상안 거부 의사를 밝힌 뒤, 은행 자율협의체 참여를 내세우며 키코 사태를 종결지을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앞서 금감원은 키코 판매 은행들이 분조위에서 논의되지 않은 나머지 피해 기업들에 대한 배상 금액을 협의체를 거쳐 자율조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자율협의체는 강제성이 없는 권고 사항에 불과해 은행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금감원 관계자는 “분조위 결과는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은행들에게 특정 행위를 강요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은행들이 6일 또 다시 수락 여부 기한 연장을 요청해도 금감원이 밝힐 추가적인 의견은 따로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