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인문학] 성찰적 이성이 실종됐다- ‘조국 의혹’을 보면서

입력 2019-08-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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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럼니스트

문제에 부딪히면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한다. 감정적으로 나서거나 감정에 휘둘리다간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니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理性, reason)이란 뭘까? 참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좀 더 넓게는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과 대비하여 이르는 말’이다. 이성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게 해주는 본질적 특성임은 이미 상식화된 생각이기도 하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이성 능력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추어진다고 여겼고 ‘양식(良識)’ 또는 ‘자연의 빛’이라고 찬양했다.

도구적 이성만으로 충분할까?

이성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하는 것, 사물을 (바라보는) 나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이성을 동원하여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의 성과로서 매우 쓸모 있음이 드러난 게 바로 과학과 기술이다. 넓은 의미의 사회과학 지식은 물론이고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다스리는 여러 기술과 제도가 출현, 발전해왔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거센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다. 선진국이나 강대국의 통치자들마저 포퓰리즘을 동원하는 까닭은 그것이 득표에 상당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표심리를 훤히 꿰뚫어 보고 거기에 영합함으로써 이성을 권력의 장악이나 유지라는 최종 목표 달성에 유효한 도구,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런 이성은 도구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성이라면 곧 도구적 이성이지 그밖에 무슨 다른 이성이 있겠느냐고 생각한다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자랑해온 이성 능력이 별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이성은 이런 낮은 수준의 도구적 성격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사물이나 사태를 보다 전체적, 본질적, 실체적으로 파악하려는 특성 또한 지니고 있다. 이런 성격의 이성은 비판적 이성 또는 성찰적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 행동해야 한다고 할 때의 이성은 바로 이런 비판적 이성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간은 진정한 지성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할 때의 그 지성인은 비판적, 성찰적 이성을 늘 원활히 발휘하는 사람, 즉 성찰적 이성 동원이 습관화된 사람을 일컫는다고 봐도 될 것이다.

우리의 이성을 흐리게 하는 것들

이성적 인식은 그리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다가가는 걸 막는 요소들이 인간에게는 많이 있을뿐더러 그런 요소들은 집요하고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접근에 장애가 되는 요소로 우선 ‘감정’을 들 수 있다. 그 강도가 미약한 경우가 아니면 거리를 두거나 억제하기가 어렵다. 본능적으로, 그야말로 무의식중에 동원되는 특성을 지녔다. 거의 반사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즉각적이다. 일시적 충동이나 분노, 기분 때문에 사소한 개인 문제는 물론이고 엄중한 국가대사마저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우리의 이성이란 렌즈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 감정만은 아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시각 또한 뭔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할 때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사실 인식에서조차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내 속 편한 대로 바라보려는 성향이 인간에게는 강력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성적 인식에의 부정적 요소로 ‘행위자-관찰자 편향(actor-observer bias)’도 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나나 내 편이 했는지 또는 남이나 남의 편이 했는지에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그러면서도 그런 모순된 태도를 당연시하는) 심리적 특성을 말한다. 한 예로서 나와 누군가가 어떤 회의에 지각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지각이라는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내가 지각한 건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고 그러니 양해될 만하다고 자신하면서, 다른 사람이 지각한 건 원래 그가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차갑게 평가하는 식의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는 말이다.

흑백논리나 거친 단순화 역시 이성적 사고와 멂은 물론이다. 세상 문제 대부분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는, 일종의 ‘연속체’다. 이런 엄연한 실상을 외면하고 그것을 단 둘로 뭉툭하게 구분해 버리는 것은 사실을 왜곡해 버리는, 위험천만한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이성을 가로막는 여러 부정적 요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결국 이성적 자세를 견지함은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건 도달 불가능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성적으로 되려는 의지, 지성인이 되려는 자세가 뿌리내리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일이다. 각계각층의 지도자에게 이런 노력이 더욱 절실히 요구됨은 물론이다.

‘남에겐 가을 서릿발, 내겐 봄바람’

요즘 한국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문제는 조국 법부무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다. 그에 대한 신문과 방송의 보도와 논란은 그야말로 ‘블랙홀’이 따로 없는 듯하다.

그동안 일반 국민에게 심어진 조국 후보자의 이미지는 어떨까? ‘외모는 온화하지만 서릿발 같은 선비정신과 국가 개혁의 열망을 겸비한 참여(‘앙가주망’)하는 지성인’, ‘기득권이나 특혜를 당연시하거나 조금이라도 수구적 관점을 취하는 사람을 준엄하게 질타해온 대학교수’, ‘기성 정치인이나 전문가 집단 등을 애국과 매국으로 양분하는 식의 이분법을 거침없이 구사해온 지식인’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데 속속 보도되는 조국과 가족의 행태는 막장 드라마의 다채로운(!) 변칙과 편법의 전시장을 연상시킨다. 아무런 흠결이 없는 경우도 드물겠지만 이처럼 다채롭게 조합된 흠 덩어리를 찾아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다른 사람에겐 가을 서릿발, 스스로에겐 봄바람’이란 이중 잣대를 꾸준히(!) 적용해온 점에서 ‘내로남불’이란 단어가 무색할 지경이다(그래서 ‘조로남불’이란 신조어가 탄생하긴 했다).

그들의 몰상식하고 비윤리적인(‘불법적인 것은 없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은 개인적인 여러 이익을 위해 효율적 방법을 수시로 동원했으니 도구적 이성 면에서 탁월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기준과 행동을 냉철하게 살펴보려는 노력엔 무관심했다. 성찰적 이성 면에서는 영점 수준이다.

조국 후보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검찰 개혁을 비롯하여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여러 과제를 추진하면서 자기가 고발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자기의 직속 기관인 검찰의 조사를 받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이런 상상이 현실로 된다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말로 대단히 ‘웃픈’ 상황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야말로 ‘동네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이번 ‘조국 장관 후보 의혹’ 소동에서 수확이 전혀 없진 않다. 그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나 해명 요청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하거나 동요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가 인용한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산과 바다처럼 당당했다. 두둑한 배짱과 두꺼운 얼굴을 지녔음을 보여줬다. 이런 두꺼운 얼굴이 정치가의 필수요건이라면, 그는 정치가가 되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확인도 의미 있는 수확이라면 상당한 수확일 듯하다. 부정적 의미에서의 정치인의 요건 충족이어서 매우 씁쓸한 느낌이 드는 수확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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