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샤오미(小米) 레이쥔(雷軍) 회장

입력 2019-05-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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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기업은 이윤을 얻고, 위대한 기업은 인심을 얻는다

중국의 스마트폰 회사 샤오미(小米)는 2013년 7월 ‘훙미(紅米)’라는 새로운 스마트폰 제품을 799위안(元)에 출시하였다. 자신들의 온라인 사이트에서만 10만 대 한정판으로 판매하였다. 놀랍게도 이 신제품들은 단 90초 만에 매진되었다.

대단히 적은 소량의 신제품만을 출시하여 판매함으로써 소비자로 하여금 갖고 싶게 만드는 이른바 ‘헝거마케팅(hunger-marketing)’ 전략이었다. 이는 중국 상업의 역사에서 재신(財神)으로 추앙받는 백규(白圭)의 박리다매 방식의 계승발전이기도 했다.

모든 기존 방식을 전복(顚覆)하다

세계인들은 중국 샤오미의 놀라운 성공을 목도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짝퉁’이니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고 평가절하 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샤오미는 단순히 ‘짝퉁’이 아니라, 우선 품질도 괜찮았다. 뛰어난 소프트웨어 능력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보통 사람들의 선입견에 비한다면 품질이 상상 외로 우수했다. 또한 기존의 판매 시장을 통하지 않고 자사의 온라인 사이트만을 통해 판매함으로써 유통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샤오미를 이끄는 레이쥔(雷軍)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수한 기업은 이윤을 얻고, 위대한 기업은 인심을 얻는다.” 샤오미는 이러한 ‘무이윤’ 정책을 통해 대규모의 고객 집단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다시 스마트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판매, 스마트폰 게임 등의 다양한 경로로 부가서비스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샤오미는 상이한 고객 집단을 겨냥해 상중하의 가격대를 설정하고 고급제품과 중저가 대중용 일반제품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판매하였다. 동시에 철저한 온라인 예매 방식으로 재고 없는 영업 방식을 실현함으로써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샤오미는 특히 고객의 경험과 체험을 대단히 중시했다. 고객들의 불만이나 요구는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하여 일주일 내에 처리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모든 엔지니어들에게 온라인 ‘논단’ 등의 채널을 통해 고객과 직접 소통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어떤 제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서비스는 어떤 점이 개선되어야 하는가 등 모든 문제에 걸쳐 솔직하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이 이뤄졌다. 실제 샤오미는 이러한 과정에서 제작되고 개선되며 단련되어졌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참여감’에 의해 샤오미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와 충성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모두 기존 방식을 ‘전복(顚覆)’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대세(大勢)를 잡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레이쥔은 1969년 12월 후베이(湖北)성 셴타오(仙桃)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한(武漢)대학교 컴퓨터학과를 수학한 공대생으로 대학에 다니던 당시부터 이미 컴퓨터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 우한대학은 중국 대학 중 최초로 학점 조기이수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모든 학점을 단 2년 만에 조기 이수했다. 대학 재학 중에 동료들과 낸 ‘심화 DOS 프로그래밍’은 당시 개발자들의 필독서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진산(金山)에 들어가 탁월한 개발 능력을 발휘하면서 6년 만에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레이쥔은 2007년 갑자기 진산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시대의 큰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야말로 핵심이다. 그러나 진산은 마치 소금밭에서 식물을 심는 것과도 같았다. 왜 내가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서 연을 날리지 못하겠는가? 태풍이 부는 곳에서는 돼지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3월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인 전자제품업체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베이징/AP연합뉴스
당시 그가 잡아낸 시대의 대세(大勢)란 바로 스마트폰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아이폰(iPhone)의 출현 이후 스마트폰은 기존 컴퓨터를 대체하여 온라인의 주류를 점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그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은 바로 뛰어난 품질과 멋진 디자인을 갖추고 동시에 저렴한 가격의 중국산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업 방향도 정해졌고, 자금도 풍부한 편이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방으로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는 먼저 당시 구글 중국엔지니어링연구원 부원장이었던 린빈(林斌)을 만나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며 자신과 함께하기를 권유했다. 린빈은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하고 곧이어 구글을 사직, 레이쥔이 이끄는 ‘해적선’에 처음 합류한 인물이 되었다. 레이쥔은 이어 저우광핑(周光平) 전 모토로라 베이징 R&D센터 고급총감 등 뛰어난 실력을 가진 총 6명의 인재들을 동참시켰다. 이렇게 모두 일곱 명은 함께 ‘샤오미 하이테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레이쥔의 나이 40이었다. 회사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는 날, 진산 시절부터 같이 근무했었고 이제 창업 동지가 된 리완창(黎萬强)의 부친이 좁쌀죽을 끓여 회사에 보내왔다. 이렇게 ‘샤오미(小米)’, ‘좁쌀’의 창업 동지 일곱 명은 좁쌀죽 한 그릇씩 나누어 먹으며, 함께 꿈을 향한 전진을 개시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드디어 스마트폰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출발은 참담했다. 첫 두 달 동안 고작 이용자 100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는 이 100명을 감격시키기 위해 고객 이름을 회사 컴퓨터 시작화면에 기록하고 회사 주소록에 추가했다. 레이쥔은 그렇게 오로지 제품과 고객에게 심혈을 기울였고, 고객과의 소통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2013년부터 3년 동안 샤오미 배터리는 무려 5500만 대 팔려나갔다. 10초마다 6대씩 팔린 셈이었다. 해외 판매도 급격히 증가하였고, 특히 인도에서 샤오미는 부동의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샤오미의 신속한 부상은 그 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히 신화적 과정이다. 이미 2014년에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샤오미 CEO인 레이쥔을 만난 자리에서 “듣자하니 샤오미(小米)가 이미 다미(大米)로 변했다고 하더군요!”라고 인사를 건넸을 정도였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레이쥔은 자기 시간의 80%를 ‘사람 찾는 일’에 쏟아왔다. 물론 ‘총명한 사람’ 말이다. 그는 매일같이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을 찾는 일에 사용했다. 샤오미 군단에 처음 진입한 100명의 직원은 모두 레이쥔 본인이 면접을 통해 직접 선발한 사람들이다.

샤오미는 일곱 명의 샤오미 창립 멤버를 제외한 나머지 전 직원들은 아예 ‘직위’가 없다. 모두가 엔지니어로서 모든 직원이 상호 간섭하지 않는다. 매주 한 시간 최상층 간부들의 정례회의 외에는 거의 회의가 없다.

탁월한 엔젤투자자로서도 유명한 레이쥔은 지금도 쉼 없이 유망한 기업에 투자하고 지원한다. 그는 이제껏 단 한 번의 투자도 실패하지 않았던 투자의 귀재로 통하고 있다. 그가 투자했던 대부분의 기업은 현재 해당 업종에서 1위를 달리거나 최소한 3위 안에 든다. 그의 투자에는 세 개의 원칙이 있었다. 첫째, 잘 알고 있지 않는 것에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리고 둘째 원칙은 사람들이 투자하지 않는 곳에만 투자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도울 뿐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특히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투자한다는 것은 그의 투자에서 가장 큰 원칙이다. 그래서 그의 투자는 반드시 ‘친구’와 ‘친구의 친구’의 단계에만 국한된다. 그렇게 두 단계 이상의 관계는 절대로 뛰어넘지 않는다.

레이쥔의 사업은 이미 스마트폰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는 세계 최대 사물인터넷(loT) 플랫폼을 구축하였고, 이제 샤오미는 신속하게 생활소비 분야로 진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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