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34. 만년필에 옻칠을 한 까닭

입력 2019-02-08 05:00수정 2019-02-0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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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지난달 일본에 있는 지인을 만날 겸 일행 몇 명과 문구(文具)여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도쿄를 중심으로 좀 떨어진 군마까지 4박5일의 일정이었다. 일행 한 명이 말했다. “매일 2만5000보 이상을 걷는 일정은 군대에나 있다.” 맞는 말이다. 마지막 날 두 명은 발과 발가락에 손톱만 한 물집이 잡혀 발을 떼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쿄 시내를 이 잡듯 다녔다. 긴자역에서 가까운 이토야와 도쿄역 근처의 마루젠 등 널리 알려진 문구점은 물론 서울 남대문시장 같은 아메요코시장까지 문구가 있는 곳이라면 빼놓지 않고 다녔다.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초밥 하나 찍어 먹을 여유도 없었던, 고생에 가까운 이 문구여행은 도대체 왜 간 것일까? 우리나라에 만년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유는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옻칠한 만년필 때문이다.

일본은 1880년대 중반 가는 바늘 같은 금속 선(線)으로 잉크가 나오는 샤프 펜슬 모양의 스타이로그라픽 만년필을 만든 적이 있지만, 지금처럼 펜촉이 달린 만년필이 등장한 것은 1905년경이다. 미국에서 금 펜촉을 수입했고 몸통은 경화고무로 만들었다. 금 펜촉을 자체 생산한 것은 그로부터 약 5년 후인 1910년경이다. 초기 생산한 제품은 영국 데라루(De La Rue)의 브랜드 오노토(onoto)를 모방해 그 비슷한 것들 일색이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 미국의 워터맨, 파커, 셰퍼 등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만년필의 재질은 경화고무였다. 경화고무는 생고무에 30~50%의 황을 넣고 가열하여 굳힌 것으로, 플라스틱 이전 만년필의 몸통 재질로 널리 쓰였다. 단단하며 산(酸)과 염기(鹽基)에 강하고 치수가 변하지 않는 것은 장점이지만 플라스틱처럼 다양한 컬러를 구현할 수 없고 투명하지 못한 것은 단점이었다. 또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햇빛을 오래 받으면 검정색은 갈색으로 변색되는 문제가 있었다.

▲경화고무에 옻칠을 해 만든 일본 파이로트의 만년필. 1920년대 제품을 최근 복각한 것이다.
1924년 셰퍼는 이 경화고무를 새로운 재질로 바꿀 때라고 생각했다. 옥(玉)처럼 보이는 초록색의 플라스틱 만년필을 내놓았는데, 이는 만년필 역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플라스틱은 경화고무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다양한 컬러는 물론 더 단단하고 가벼웠다. 한 세대 넘게 사용해온 경화고무는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이었다. 메이커들은 하나 둘씩 경화고무 만년필의 생산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1925년 태평양 건너에 있던 일본의 파이로트(Pilot) 역시 오래 사용해온 경화고무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파이로트가 특히 주목한 것은 햇빛에 변색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옻칠이었다. 옻칠은 경화고무의 변색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매끄러운 감촉에 더 단단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순식간에 일본 전역으로 퍼졌다. 1925년에만 30만 개가 넘는 옻칠 만년필이 팔릴 만큼 대유행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가 부족했다. 다양하지 못한 컬러였다. 검고 붉은 단조로운 색 말고 좀 더 화려한 것이 필요했다. 1926년 파이로트는 이런 불만을 기다린 것처럼 옻칠한 만년필에 금과 은을 가루로 내어서 뿌리거나, 금붕어나 용, 원앙, 극락조 등을 그리는 마키에(蒔繪·Makie)를 한 제품을 내놓았다. 옻칠한 만년필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일본에서 유행했다면, 마키에는 담배 파이프와 라이터를 만드는 남성용품의 대명사였던 영국의 던힐이 관심을 가질 만큼 전 세계가 주목했다. 일본이 18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만년필을 만들어 온 지 약 40년 만에 세계 무대에 첫 등장한 것이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 비록 모방으로 시작하였지만 열심히 만들다 보면 창조도 나오고 성공도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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