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정치학과 객원교수
이 개념은 미국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이래 사용해온 것이다. 그런데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직후에 후속협상차 평양에 간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김영철 통전부장 간의 협의 과정에서 CVID가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북한이 폼페이오의 CVID 요구를 강도적이라고 맹비난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원래 CVID는 클린턴 행정부의 뒤를 이어 집권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인 네오콘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의 핵심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클린턴에 대한 거부감을 ‘ABC(Anything But Clinton의 약자로서 클린턴이 한 것은 무엇이든지 폄하하는 분위기를 지칭)’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서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은 클린턴 행정부의 북핵 협상에 대해서도 극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북핵 협상 결과는 이른바 Agreed Framework(AF)로 약칭되는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망라되어 있었다. 네오콘은 AF가 잘못된 합의라고 보았다. 부시 행정부 초기에는 파기하려고 나설 정도였다. 당시 파월 국무장관을 비롯한 온건파와 한국의 김대중 정부가 적극 만류하여 파기는 막았으나, AF에 대한 네오콘의 부정적 인식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AF의 잘못된 점을 시정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하였다. 그 생각이 CVID로 표현되었다. 북핵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안적 목표인 셈이었고, 그 기저에는 클린턴식 AF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CVID의 각 용어를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런 점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완전한(Complete)’을 보자. 이 개념에는 AF가 영변의 일부 핵시설만을 대상으로 한 불완전한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에 반하여 부시 행정부는 모든 핵 물질과 관련된 모든 시설을 대상으로 하여 완전한 해결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다음으로 ‘검증 가능한(Verifiable)’을 보자. 이것은 AF가 검증 체계를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취지이다. ‘불가역적(Irreversible)’은 AF가 영변 핵 시설을 재가동할 소지를 남겨 두는 잘못을 범했으나, 부시 행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컨대 AF에 따르면 영변 흑연로의 사용 후 연료봉은 영변 시설 내 수조에 보관하도록 합의되어 있었다. 사용 후 연료봉을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북한 내에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미북 간에 분란이 심화하자 북한은 이것을 수조에서 꺼내 재처리해 버렸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가 이처럼 되돌릴 수 있는 가역적 합의를 해준 것은 잘못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폐기(Dismantlement)’인데, 이것은 AF가 영변 시설을 장기간 동결(Freeze) 상태에 두는 합의인 데 반하여, 부시 행정부는 폐기를 추구한다는 취지였다.
이러한 연원을 가진 CVID를 북한이 좋아할 리가 없다. 북한은 처음부터 거부하였다. 당시 한국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CVID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개념의 목표가 너무 높아서 북핵 문제해결 과정을 추동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이 첨예화하면서 CVID에 대한 국제적인 수용 태세가 크게 달라졌다. 급기야 CVID 표현이 안보리 결의에 포함되어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범국제사회에 통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금년 초부터 남북, 미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비핵화 문제가 최고위급의 협상 소재가 되면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려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 전력 운용을 비롯한 위협이 없어져야 하며, 그래야 북한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완전한 비핵화가 이룩된다는 취지에서 나온 용어이다.
이 용어가 미북 정상회담 문건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그 후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측 상대를 만나,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비핵화를 약속하였으니 CVID의 길에 나서라고 주문하였다.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논의된 것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이지 CVID가 아니라고 하며 반발하였다. 북한이 폼페이오 장관의 주문을 ‘강도적’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한편 미국은 근래 CVID를 조금 다르게 풀어쓴 FFVD라는 용어도 자주 사용한다. FFVD는 Final and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의 약자이다. ‘최종적이고 전적으로 검증된 비핵화’라는 뜻이다. Complete와 Irreversible을 Final로 대체한 것이니 그 의미는 CVID와 유사하다.
이처럼 미북 간에는 CVID/FFVD냐, 아니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불거졌으며 이는 결국 비핵화 협상의 정체(停滯)로 이어졌다. 즉, 미북은 비핵화의 개념을 두고 다투는 셈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국의 입장은 모호하다. 한국은 미북 간의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어 한반도에 비핵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입장이므로, 협상이 비핵화의 개념에서부터 공전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한동안 한국은 CVID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그리 다르지 않고 유사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막상 북한이 CVID를 공개적으로 매도하고 나오자 그런 해석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 비핵화 협상은 새해로 들어간다. 새해에 금년 초부터 전개되었던 정상외교가 재연될지, 그렇다면 그 성과물은 금년과 무엇이 다를지가 관심사로 된다.
만일 새해에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거기에서 정상들이 앞서 말한 비핵화의 개념을 비롯한 주요 쟁점에 대해 톱다운으로 큰 틀의 교통정리를 해 준다면, 후속 협상은 동력을 얻을 것이다. 지금 미북은 비핵화 개념 외에도 비핵화부터 할지 신뢰 구축부터 할지 우선순위를 두고도 논쟁하고 있다. 아울러 비핵화를 한다면 핵·미사일 등 중요 부분부터 폐기하는 프론트 로딩식 접근을 할지, 아니면 쉬운 부분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할지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에서는 이러한 쟁점에 대해 톱다운식의 교통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싱가포르회담은 북한에 북한식 비핵화 개념이 받아들여졌다는 믿음을 심어준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북한은 자기식 비핵화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초유의 미북 정상회담이라는 빅뱅에도 불구하고, 후속협상이 정체되는 역설이 벌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금년의 경과를 돌아본다면 새해의 비핵화 협상을 낙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과거의 반복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새해의 상황 진전을 소망한다.
주러시아 대사,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