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도 대필 후 자신의 이름을 붙여 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른바 ‘고스트라이터’, ‘유령작가’ 등으로 일컫는데, 일반적으로 유령작가가 허용되는 저술 영역으로는 대법원 판결, 유명인 또는 정치인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있다.
정치인의 경우 유령작가를 고용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선거전에 뛰어든 정치인 중에는 정치적 식견을 담아 책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책을 대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작가들이 있을 정도다. 여기서 일반적인 학술적 글쓰기에서처럼 누가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책의 내용대로 정치를 하는지가 중요하며, 그에 따라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뿐이다. 책에 쓴 대로 입법 등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정치인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본인이 직접 작성해야 하는 학위논문 등 학술적 성격의 저술에서는 정치인이라 해도 유령작가가 허용되지 않음은 당연하다.
유력 정치인 중에는 은퇴 후 더러 자서전 또는 회고록을 내기도 한다. 현역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기 때문에 직접 집필하는 경우도 있지만 건강 등의 이유로 대필작가를 고용하기도 한다. 은퇴한 후이므로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책 내용에 대한 정치적 책임보다는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다를 경우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제기될 법적 책임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경우 책을 내지 않거나 낼 경우에는 이를 대비해 꼼꼼히 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유령작가가 허용될 수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한 법적 책임은 오롯이 해당 정치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한 전두환 씨는 작년에 펴낸 회고록 내용에 법적 문제가 발생해 기소됐는데 최근 공판에 불출석해 논란이 일고 있다. 측근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어 출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와병 중인 사람이 어떻게 회고록을 쓸 수 있었느냐는 비판이 일자, 전직 비서관은 초고는 전두환 씨의 구술에 의해 작성됐지만, 구체적 표현은 자신이 썼고 전두환 씨는 퇴고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유령작가 또는 대필작가를 자처한 셈이다.
일반적 저술과 달리 정치인에게 예외적으로 유령작가 또는 대필작가를 허용하는 것은 그렇게 출판된 책으로 인한 영욕, 법적으로 말하면 민사 및 형사책임을 명의 저자가 전적으로 부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사회적 합의하에 비로소 독자들은 정치인 명의로 출판된 책에서 정보를 얻거나 때로는 사실로 믿기도 하는 것이다. 전두환 씨가 회고록을 집필한 목적이 애초 취지대로 역사적 사료로 남기기 위한 것이라면 칭병(稱病)으로 법정 출석을 피해서는 안 된다. 비서관의 말대로 전두환 씨가 퇴고조차 하지 않은 채 병중에 책이 나온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그의 가족은 회고록을 전량 회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출간 직후 가처분을 당하여 일부 내용을 삭제하면서까지 재출간한 것을 보면, 회고록 출간에 대한 본인의 의지가 여전히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더더욱 법정에 출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