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은 딱딱해서 재미없고, ‘미스터 션샤인’은 재미는 있으나 사실(史實)과 동떨어져 ‘가짜 역사’에 속기 싫다는 분들은 을사늑약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운미의 회상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적당한 만족을 찾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불구불한 만연체 문장에 ‘줄느런히’ 박혀 있는 잘 쓰이지는 않는 우리말과 한자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도 재미이지만, 세 사람의 언행과 처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운미의 동생뻘인 계정(桂庭) 민영환(閔泳渙, 1861~1905)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하고 창피함을 못 견뎌 자결한 분입니다. 운미는 계정이 자결한 소식을 듣고 슬픔으로 그를 회상하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운미는 “신하는 상감(고종)의 명이 떨어지기를 매양 기다려야 하는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지만, 때로는 영을 어서 내립시라고 재촉할 용기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그러지 못하는 용신(庸臣, 어리석은 신하)”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그러자 계정은 즉각 “내가 하겠습니다. 간단합니다. 그게 뭣이 어렵습니까. 앞뒤 따지지 말고 성큼 나서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달리 통촉하셔야 옳습니다, 이렇게 분질러 아뢰고 나면 그뿐이고 그다음은 말이 말을 몰아가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의 기개와 강단에 제 피가 끓었습니다(얼마 만인지!).
마지막은 도원(道園) 김홍집(金弘集, 1842~1896)입니다. 운미는 도원에 대해 “그이는 어떤 일을 맡겨도 달다 쓰다 말도 없이 온 힘을 다 쏟아붓는다. (제물포조약 같은) 그런 국사야 죽도록 고생해 봤자 욕만 먹을 궂은일인데도 그는 아래위 사람의 손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성사시켰다. …. 그는 누구에게라도 공무에 임할 때처럼 방정하고, 말씨에도 그 개결(介潔)한 성품이 배어 있다”고 회상합니다. 이런 사람이 개화를 주장했다고 친일파로 몰려 민중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총리대신일 때였습니다. 눈앞의 일본군에게 몸을 맡기면 살 수 있었으나, 차라리 우리 백성에게 맞아 죽겠다며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있었는데도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지금 우리 조야에 이런 분들이 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