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중견·중소 조선소도 국가 생태계…통영만 1만명 실직”

입력 2018-02-0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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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STX조선해양에서 인부들이 선박 건조 초기 단계인 블록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에서 회생 결정을 내린다면 3월부터는 도크 위에서도 선박 건조가 진행될 예정이다.(창원·통영=정다운 기자 gamja@)

용접공은 한 손엔 물줄기를, 또 다른 손엔 용접기를 잡고 몸보다 큰 쇠 철판을 휘고 있었다. 철판은 불이 닿으면서 구부러지다가 찬물을 맞으며 알맞은 각도로 접혀나갔다. 차로 공장 곳곳을 안내하던 STX조선해양 직원이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Co2 용접기와 물이 만나 만들어진 매캐한 연기가 차 안으로 훅 밀려들어왔다. 공정마다 드문드문 배치된 용접공들은 천천히 차를 타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의 시선에 하던 일을 잠시 멈췄다. ‘오늘은 누가 우리의 생사를 물으러 왔나. 앞으로 이곳은 어떻게 되나. 저들은 알까.’ 용접기를 든 채 건너편에서 묻고 있는 듯 했다.

“선박의 일부가 될 철판 블록을 만드는 건 기계가 하기도 하지만 저렇게 기술자의 손을 거쳐야만 하는 부분도 많죠. 하늘 아래 같은 배가 없다는 게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지난 2일 방문한 경남 창원 STX조선해양에서 공두평 총무보안팀장이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배가 조립되는 야드는 아직 텅 비어있었지만 3월 본격적인 건조 작업을 준비하는 블록공정이 한창이었다. 물론 이는 이달 중 정부가 STX조선해양을 청산하지 않고 살리겠다는 결정을 해야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삼정KPMG는 오는 6일 STX조선해양과 성동조선해양의 최종 컨설팅보고서를 산업통상자원부에 전달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해당 보고서를 받아본 뒤 산업은행(STX조선해양 대주주)과 수출입은행(성동조선해양 대주주)을 비롯 금융위원회, 기획재정부 등과 공유할 예정이다.

왜 중견·중소 조선소를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는 감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면 살리는 이득이 크다는 점에서다. 실제 STX조선해양의 경우 확보해 둔 수주 잔량이 꽤 있었다. 특히 이투데이가 방문한 당일 회사 측은 그리스 선주사 판테온에서 탱커(유조선) 옵션분 2척을 추가로 수주했다.

김영민 STX조선해양 조선소장은 조선소의 크기와 특성별로 수주할 수 있는 배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견·중소 조선사가 사라지고 대형 3사만 남게 되면 벌크선, PC선, 탱커 등 특정 유형과 크기의 선박 건조에서 한국의 저력도 사라진다는 의미다. 김 소장은 “단순히 한 영역을 잃는 것이 아니라 관련 부품을 만드는 후방업체들이 무너지고 그로인해 대형 조선소도 타격을 입게된다”며 “조선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생태계 파괴는 일어나고 있었다. 창원시 진해구 곳곳에는 ‘조선업희망센터 실직자 창업지원 1기 모집’ 따위의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STX조선해양은 2013년 7월 말 자율협약 이후 지난해 말까지 크게 3차례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사내협력사 직원을 포함해 8105명에 달하던 인원이 2071명으로 줄었다. 일시에 직장을 잃은 6000여 명의 실직자를 희망센터라는 곳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통영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앞바다에 떠있는 많은 섬들이 큰 파도를 부숴주는 덕분에 최고의 조선 환경으로 꼽혔던 곳이다. 진해에서 통영으로 77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는 길에서 거대한 크레인에 새겨진 고성조선, SPP조선, SLS조선(신아SB), 21세기조선, 삼호조선 등의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 이들은 모두 망해 폐조선소가 됐거나 매각을 기다리는 처지다.

유일하게 숨줄이 붙어 있는 성동조선해양은 더욱 심각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자율협약 전이던 2010년 3월 말 6672명이던 사내협력사 직원은 지난해 말 기준 32명밖에 남지 않았다. 성동조선 본사 직원도 2289명에서 1248명으로 반토막났다. 이 중에서도 1000여명은 정부의 회생 결정이 나올 때 까지 휴직상태다.

성동조선에서만 당장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약 1만명의 구조조정 상황은 지역 경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현대중공업에서 2014년 성동조선으로 이직한 민창섭 대리는 “통영 중림신도시 아파트 가격이 최근 4000만~5000만 원씩 떨어졌다”며 “성동조선 직원 뿐 아니라 식당, 편의점 등 상점에서 오히려 성동조선의 존폐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고 말했다.

▲2일 경남 통영시 성동조선해양 2야드에서 선박 건조에 사용되는 철판들이 비닐에 덮여있다. 지난해 수주한 5척의 선박을 만들기 위한 철판들이지만 정부 결정이 나올 때까지 강재작업을 미뤄달라는 선주사의 요청으로 보류 중인 상황이다.(창원·통영=정다운 기자 gamja@)

이날 기자를 안내한 성동조선해양의 배운용 차장 역시 STX조선의 공 팀장처럼 직함 앞에 총무·홍보·보안 세개나 담당 부서가 붙었다. 출근 인력이 거의 없는 탓이다. 그는 텅 빈 조선소를 꼼꼼히 돌며 이정도 규모와 설비를 갖춘 조선소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는 점을 내내 강조했다. 성동조선은 육상에서 바다로 선박을 보내는 ‘로드아웃’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건조한 곳이다. 그러나 STX조선과는 달리 유동성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연간 금융비용은 500억을 훌쩍 넘는다. 은행의 전격적인 채무탕감과 신규자금 지원이 없이는 더 이상 수주가 어렵다.

2012년 핀란드 정부는 노키아를 버리고 실직자에 대한 직접 지원을 택했다. 500일 실업수당, 185일 취업프로그램 보조금은 물론이고 이 정부가 사양산업이라고 판단한 휴대폰 제조업이 아닌 신비즈니스 분야로 재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일명 ‘노키아 브릿지’다. 늦어도 내달 발표될 정부의 조선업 혁신 방안이 다시 한 번 조선업을 살릴 지, 아니면 과감히 고인 물을 버리고 실직자들을 구제할 지 아직 알 수 없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한 근무자는 “STX조선과 성동조선을 합병하자는 식의 전형적인 금융비용 논리는 다같이 죽자는 의미일 뿐”이라며 “정부와 채권은행들이 대우조선 뿐 아니라 중소 조선사도 국가 기간산업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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