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나라를 재건한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은 가난하고 배를 주리면서도 책을 폈고 그 책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디 책상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아궁이 위 찌그러진 솥이 걸린 그 옆에 손바닥만 한 편편한 곳에서 책을 펴고 글씨를 썼던 그 세대들이 결국은 노동의 가치를 넘어 지식의 세상을 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부뚜막 정신’이라고 불렀다. 한국인의 정신에 이만한 것도 없다. 책상이 없다면 나뭇잎 위에서도 책을 놓고 봐야만 하는 당찬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고추 정신’이 아닌가. 그러니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더러 자기 것을 파먹고는 텅텅 비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이 아니다. 진정한 한국인은 ‘없다’가 아니라, 그래서 ‘할 수 없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내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인의 붉은 피의 상징인 것이리라.
우리는 흔히 한국인을 ‘빨리빨리’의 대명사로 부르지만 나쁘지 않다. 이 빠른 정신이 오늘의 한국토목공사가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터널을 뚫고 산을 지나가는 길을 만든 것도 바로 그 ‘빨리 정신’이다. 한국인에게는 ‘막차 의식’이 있다. 마지막 기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어느 나라처럼 지금 못 가면 내일 가고,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은 막차를 못 타면 죽는다는 각오로 모든 장애물을 비집고 그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탄다.
그러면 꼭 그 기차를 타야 하는 지상 절대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집단 속에서 그저 늦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집단적 흥분과 스스로의 강압 속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린다. 이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처지지 말라’는 자기암시로, 그토록 급하게 거의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없지 않다. 다 좋을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결국 ‘해내고 만다’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많은 부작용을 거쳤다. 아니 지금도 겪고 있다. 마지막이란 말에 한국인은 절박해진다. 연애도 학교도 직장도 돈에서도 이 마지막은 피를 끓게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현실에서 대학 진학으로 이어지고, 직장에서 진급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뚜막은 순수 욕망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은 더러 거친 욕망이나 과도한 욕망으로 자기를 패하는 경우가 있지만 손바닥만 한 부뚜막의 온기는 인간까지 순하게 만들어 할머니 그 할머니의 어머니들이 오늘의 삶을 이어준 것이다.
12월이다. 마지막이란 말이 주는 다급한 욕망을 열정이라고 부르고 그 열정의 힘을 기울여 마지막 달의 모습을 새해 1월에 당당히 비출 수 있게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달이다.
막차 의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의 의미가 있지만 맹렬한 잡중력이 있는 차디찬 얼음의 기류도 그 안에 흐른다. 모든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로운 살로 복원(復元)하는 치유의 힘으로 희망이라는 깃발이 부르는 새해로 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