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재심서 “제공만 하면 문제없다”처벌도 경징계 그쳐…“금감원이 방조·공조한 셈”
2008년 1월 삼코는 하나은행과 키코 계약을 맺으면서 풋옵션과 콜옵션 가격이 같아 추가 프리미엄을 낼 필요가 없다고 안내받았다. 그러나 2012년 소송 과정에서 은행이 법원에 제출한 옵션 평가금액을 보면, 기업이 매수한 풋옵션 평가금액은 1만96달러이고 은행에게 판 콜옵션 평가금액은 5만7485달러로 나타난다. 삼코를 비롯한 키코 가입 기업들은 은행이 ‘임의로’ 과한 마진을 붙인 풋옵션을 비싼 가격에 사고 콜옵션은 비용 등이 차감된 채로 실제 가치보다 싸게 판 것이다.
현행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과 파생상품업무처리모범규준에서는 키코와 같은 비정형 파생상품의 경우 내재된 개별 거래마다 각각의 가격정보(대고객 가격)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은행이 홍보한 인위적인 제로코스트는 진정한 의미의 대고객 거래가격이 아닌 금융기관의 거래원가(마진 포함)에 가깝다. 그럼에도 서울고등법원의 유권해석 요청에 대해서는 가격 제공 행위만 있었다면 허위·은폐·과장 여부도 무관하다고 답변한 것이다.
그러나 금감원은 이미 2005년 도이치은행 등 외국은행 서울지점 4곳의 비정형 파생상품 거래 사고를 검사·제재한 경험이 있어 ‘대고객 가격정보 제공’ 문구 취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고객 가격’이라는 문구는 도이치 사건의 후속조치로 금감원이 은행업감독업무시행세칙 제6조 ‘장외 파생상품거래’조항을 새로 만들면서 법규에 처음 기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금감원은 도이치은행과 BNP파리바은행 등이 파생상품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공기업과 거래를 하면서 거래의 정확한 실체와 잠재적 손실 요인 등 중요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이치은행은 고객이 비정형 파생상품을 중도해지할 때 거액의 조기해지유보금을 반환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거래가격에 포함돼 있었지만 이 사실조차 고객에게 고지하지 않았다.
금감원은 가격에 포함된 조기해지유보금이 고객의 중도해지 여부와 그 시기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정보였지만 은행이 고지하지 않음에 따라 사실상 ‘숨겨진 수수료(마이너스 시장가치) 로 기능한 점을 무겁게 봤다. 이에 당초 도이치은행에 ‘3개월 파생상품 영업정지’, BNP파리바은행에 ‘1개월 파생상품 영업정지’ 등 강한 처분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고지의무는 파생상품 모범규준에서만 다루는 등 명확한 감독기준이 없어 ‘기관경고’ 로 제재 수위를 낮췄다. 대신 관련자들에게 위법·부당행위 책임을 물어 면직하거나 감봉 이상 조치에 취하는 등 중징계를 내렸다.
반면 키코 사건에서 금감원은 4차례에 걸쳐 14개 은행을 검사하고도 11곳 은행에 모두 ‘기관주의’를 주는 데 그쳤다. 현행 규정상 기관주의가 3년간 3회 누적돼야 중징계인 기관경고를 받는 정도다. 기관주의 사유는 대부분 ‘합성옵션의 개별 옵션별 거래정보 미제공’(8개 은행)이었다. 대고객 가격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을 징계하면서도 상품의 사기성은 검토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키코를 국내에 처음 들여와 가장 많이 판매(기업 177곳)한 은행 중 하나인 씨티은행은 기관주의조차 받지 않고 모두 개인제재에 그쳤다. 개인 제재마저도 9곳 은행의 72명이 대상이 됐지만 감봉은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견책(14명)·주의(54명) 조치로 마무리됐다. 불문조치 등 생략자를 제외하면 실제 제재 대상자는 다시 50명으로 줄었다.
도이치은행 비정형 파생상품 사건과 키코 사건을 다루는 금감원의 온도차가 큰 것은 제재심의위원회 의사록을 보면 더 여실히 드러난다. 키코 제재심은 총 5차례나 열렸지만 이미 2005년 쟁점이 됐던 도이치 사건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제재심에서 논점은 기업이 수출 예상액을 초과해 통화옵션계약을 체결한 ‘오버헤지’에 대해 현행 규정상 은행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여부였다. SC은행, 외환은행, 우리은행 등의 실무자들은 제재심에 출석해 기업이 적극적으로 오버헤지를 요구했고 은행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을 뿐이라는 진술을 반복했다. 이외에도 키코 계약이 기존 거래 손실을 신규거래에 반영하는 불건전한 거래였는지가 은행 리스크 감독 차원에서 쟁점 사안이었다.
국회 정무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도이치 사건 당시 금감원에 비정형 파생상품 ‘거래 체결 당일’에 내재된 개별 거래의 대고객 가격을 고지하도록 하는 조항을 도입하라고 권고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며 “키코 사건은 그 발생과 처리 과정에서 금감원이 방조·공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