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공간] 아직 더 갈 데가 있다

입력 2017-11-0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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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노래

11월은 가을의 식민지

무능한 정부는 늦게 온 꽃마저 시들게 하고

돼지감자를 살찌운다

망명지의 산골마을 커피집

문짝에 적힌 대로 전화를 하고 한참 기다리자

주인은 어디선가 늙은 차를 몰고 왔다

마약이 따로 없다

날이 차고 무는 바람이 든다

나도 나에 대하여 할 만큼 했으므로

소설(小雪) 지나 송창식이나 부르며

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제국의 햇빛은 보드카처럼 희고

산천은 벌써 기가 죽었다

그때야 그랬다 하더라도 누가

저 산그늘 속의 버섯이나

풀잎들의 노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

그래도 날마다 가을이다

당국의 허가도 없이 식민지 시인들아

사는 게 다 거기가 거기라고

쓰러지는 꽃들을 위로하지 말라

이렇게 불온한 시절도 가고 나면 그만

11월이여

나는 아직 더 갈 데가 있다

시집『달은 아직 그 달이다』에서

설악산 대청봉에 올해의 첫눈이 내렸고, 대관령에는 얼음이 얼었다.

아라파호족 인디언은 11월을 일러 ‘모두 다 사라진 건 아닌 달’로 불렀다고 한다. 이제 눈 덮이고 찬바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게 사라지기 전의 한참이 더 서운하고 아쉽다. 그러나 머잖아 12월이 오고 개인들의 삶이나 회사는 물론 국가도 한 해를 결산하고 미진한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

조선시대의 ‘농가월령가’에서는 11월을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하였던고/ 몇 섬은 환곡 갚고 몇 섬은 세금 내고/얼마는 제사쌀이요 얼마는 씨앗이며/소작료도 헤아려 내고 품값도 갚으리라/꾼 돈과 봄에 꾼 벼를 낱낱이 갚고 나니/많은 듯하던 것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세금에 임차료, 인건비, 재료비를 계산하고 나니까 남는 게 없다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삶이 팍팍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꽃들은 쓰러지고 제국의 햇살은 보드카처럼 날카롭다. 불현듯 커피가 그립고 뭔가 하려고 했으며 살려고 애쓴 나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달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더 갈 데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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